‘공포(terror)’로는 이길 수 없다

최순욱

발행일 2015.11.18 13:10

수정일 2015.11.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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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타고 있는 전쟁신 아레스와 포보스(공포). 기원전 5세기 경에 제작된 항아리에 그려져있다.ⓒ위키피디아

전차를 타고 있는 전쟁신 아레스와 포보스(공포). 기원전 5세기 경에 제작된 항아리에 그려져있다.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7)

지난주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한 프랑스 파리 테러의 놀라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특정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곳도 아닌 곳에서,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 수백 명을 향한 무차별적 공격은 그야말로 ‘테러(terror: 공포)’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야만적 행위다.

IS도 뭔가 주장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서구 세계에 전쟁을 선포했고, 그 수단으로 무차별적 테러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민간인 보호는 존재 자체가 비극인 전쟁터에서조차 인간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는 그것이 무엇이던지 간에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민간인에 대한 테러리즘은 강한 역량을 가진 자의 반격만을 불러올 뿐, 그들의 주장을 듣게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저항할 수단이 적었던 때에도 사회주의 이론가 레온 트로츠키는 사회 체제에 장기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노동 대중 사이에 더 큰 혼란만을 불러일으킨다며 테러리즘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고대 신화들도 공포와 살육을 통해 이룩한 것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공포, 즉 테러를 상징하는 포보스(Phobos)와 두려움을 의미하는 데이모스(Deimos)는 모두 전쟁신 아레스의 아들들로 아레스가 싸움에 나설 때 항상 그와 동행한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쟁과 공포, 두려움은 한 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공포를 동반한 전쟁신은 산을 들어 거인들을 깔아뭉개 죽일 정도로 힘이 좋으면서도 실제로 싸움에서 이긴 경우가 별로 없고, 다른 신이나 인간에게 항상 절절매곤 한다. 또 다른 아들 퀴크노스를 죽인 헤라클레스를 죽이려 창을 던졌으나, 도리어 이를 피한 헤라클레스의 창에 허벅지를 관통당한 일도 있었고, 거인 형제에게 붙잡혀 청동 항아리 안에 13개월이나 갇힌 적도 있었다.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을 때에는 아르고스의 왕 디오메데스에게 창을 맞아 올림포스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대신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는 자신이 개입한 전쟁에서 진 적이 없다. 헤라클레스와 디오메데스가 아레스에게 상처를 입히기 전에 먼저 그의 공격을 피하게 해 준 것도 아테네다. 그리고 아레스와 아테나는 남매간이지만 항상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무차별적 살육과 공포로는 진정한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것이든 싸움이라는 것이 결국 나의 주장을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파괴를 통한 공포가 아니라 전략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아레스가 트로이 전쟁에 어떤 명분 때문에 참전한 것이 아니며 그저 사람들을 많이 도륙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가며 싸웠다고 하며, 이를 본 신들의 왕 제우스가 아레스에게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 신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 밖에는 모르는구나.”라고 호통을 쳤다고 전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약자가 가진 최후의 저항 수단으로서 폭력이 정당화되는 경우도 제한적이나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행위는 여기에 절대로 포함되지 않는다. IS가 정말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차별적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