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장군 후손, 결국 영화〈명량> 관계자 고소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4.09.16. 15:56

수정일 2014.09.16. 15:56

조회 1,749

명량(사진 뉴시스)

[서울톡톡] 17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명량>이 소송에 휘말렸다. 경주 배씨 성산공파 문중 비상대책위원회가 정부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에 상영 중지를 신청한 데에 이어, 영화 관계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명량> 속 경상우수사 배설의 묘사에 심각한 역사왜곡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영화에서 배설은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고 하고, 거북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다 안위의 화살에 맞아죽는 인물로 묘사됐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배설이 명량해전 전에 조선군을 이탈한 것은 맞지만 영화처럼 반역죄를 저지르진 않았다. 배설이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심정에서 조선군을 이탈한 것인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가 배설을 과도하게 악인으로 표현해 '후손들이 군대·학교·직장에서 동료들의 수군거림이나 놀림·왕따의 대상이 되고 있어 피해가 적잖다'고 배씨 문중은 호소한다.

<명량>이 배설을 이렇게 악인으로 묘사한 것은 이순신 장군을 위대하게 그리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위대한 승리를 일궈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악인이 필요했고, 배설 장군이 '당첨'된 것이다. 굳이 이렇게 역사상의 인물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아도 이순신 장군은 충분히 위대하다. 역사기록에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어도 국민적인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꼭 악인의 존재가 필요했다면 실제 인물에게 가상의 악역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아예 가상의 캐릭터를 집어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을 두고 후손들이 일일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창작물은 창작물대로 여유롭게 봐주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읽을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 근대적인 개인의 사회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점 말이다. 모두가 개인이라면 몇 백 년 전 역사 인물이 어떤 행동을 했건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몇 백 년 전 인물과 지금의 개인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한다. 현재 사는 사람들에게 배설 후손이라고 조롱하는 이들이나, 자신이 배씨라서 영화에 모욕감을 느끼는 이들이나, 개인의 독자성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같은 사고방식을 공유한다.

한국사회는 개인이 아닌 집단들의 사회다. 성씨로 구분된 문중이 있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구분되는 지역이 있고, 출신대학으로 구분되는 학벌이 있다. 각 개인의 개별적인 특성이나 능력보다 그가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우린 사람을 판별할 때 어디 사람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를 꼭 따진다. 고향별, 학교별로 파벌이 갈리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는 힘센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경쟁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경쟁이 바로 망국적인 사교육병을 낳은 입시경쟁이다. 최고 학벌에 들어가기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이다. 사회로 나온 다음엔 학벌이나 지역별로 뭉쳐 조금이라도 자기들 집단의 지위를 훼손할 만한 일들을 경계한다.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사고를 저질렀을 때 한국인들이 '나라망신'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집단적 사고방식의 발로다. 미국인들은 그저 한 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인은 그로 인해 한국인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여긴다. 이렇게 뿌리 깊은 집단적 사고 때문에 한국에서 사극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각 문중에서 역사 인물의 묘사를 자기들 문중 전체의 이해관계 사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집단이 개인에 앞서는 전근대적 풍습과 디지털 21세기의 공존.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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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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