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

늦가을 나들이로 딱!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덕수궁’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던 광명문 ⓒ박분 서울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은 동서양의 건축이 한 데 어우러져 있어 전통과 근대를 같이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때문에 언제 방문해도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지만 단풍 곱게 물든 가을의 덕수궁을 놓칠 수 없어 발걸음을 옮겼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 광명문 앞에 다다르니 순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덕수궁 초입에 자리한 광명문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훼손되면서 광명문은 덕수궁의 서남쪽으로 옮겨졌고, 지난해 비로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80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광명문 앞에서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관리소가 공동 주최하는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기억된 미래’전이 진행 중이다. 고종황제 서거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근대의 태동을 알렸던 대한제국 시기 미래 도시를 향한 꿈을 건축가들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전시이다. 광명문 중앙 출입구에 설치된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새로운 문이 계속 열리고, 끊임없이 화면이 변화하는 '밝은 빛들의 문' 작품은 ‘기억된 미래’ 전시작품 중 하나다. 중화전 앞마당에 설치된 작품 '대한연향' ⓒ박분 중화문 너머 중화전 앞마당도 설치작품으로 환하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거리는 전시물의 이름은 ‘대한연향’이다. 1902년 중화전 앞마당에서 열렸던 대한제국 마지막 전통연회의 기억을 담아 연회에 사용되었던 가리개인 만인산, 천인산을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한다. 반사필름들이 서로 부딪치며 오색으로 반짝이는 황홀한 풍경에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궁궐에서 열리기 때문인지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미술에 대한 접근이 즐겁기만 하다. 전시작품은 석조전과 함녕전에도 설치돼 있다.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기억된 미래’전은 내년 4월 5일까지 계속되며 오후 1시 30분과 2시 30분, 두 차례 광명문 앞에서 전시해설이 진행된다.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으로 드나드는 정문인 중화문 ⓒ박분 중화...
덕수궁 정관헌

‘애잔한 아름다움’ 가을을 닮은 덕수궁 정관헌에서…

덕수궁 정관헌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3) 덕수궁 정관헌 시청과 접해있는 덕수궁은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걷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석조전 같은 이색적인 건축물이 있고, 미술관도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 활동을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 걷기 좋은 정동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과 역사 나들이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을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덕수궁을 들어가면 남들처럼 직진해서 중화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어서 돌담길 카페 옆의 연못을 둘러보고 담장을 따라 빙 돌아서 정관헌으로 향한다. 정관헌은 석조전만큼이나 이질적인 서구식 건축물이다. 돌로 만든 기단과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세워진 벽체 위로 녹색 지붕이 드리워진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건축 양식의 이름을 가져다 붙여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낯선 형태이기도 하다. 거기다 발코니처럼 둘러진 공간의 난간과 기둥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한옥의 단청과는 사뭇 다른 형태라서 눈길을 머물게 한다. 덕수궁 정관헌 정관헌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이 만든 건물로 고종이 커피를 마시거나 외국 사절단을 접견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언덕 같은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거나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기에 더 없이 적당한 곳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예전에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아쉬움은 이곳을 무대로 한 각종 행사들, 특히 고종이 이곳에서 외국 공사들과 만나는 접견례를 재현한 행사들을 보는 것으로 달래고 있다. 궁궐은 임금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모시는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손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권력의 주체가 국민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
남산골 양탕국 체험장 남산국악당 야외전시실 내부

봄날의 커피 좋아하세요? 남산골 ‘양탕국’ 체험 강추

남산골 양탕국 체험장 남산국악당 야외전시실 내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지난 3월부터 전통체험이 한창이다. 작년에 인기를 끌었던 떡만들기, 천연염색, 다례체험은 포함해 규방공예, 전통무예, 색연필로 그리는 민화, 남산골 양탕국 체험 등이 올해 새롭게 추가돼 프로그램이 더욱 다채로워졌다. 봄비 내리는 날, 한옥마을을 찾아 ‘탈 만들기’와 ‘남산골 양탕국’ 제조에 도전해봤다. 우선 이승업가옥에서 한복을 입었다. 한복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신구들도 갖춰져 있어 취향대로 맘껏 치장할 수 있다. 한복과 다양한 장신구들이 갖춰져 있어 취향대로 맘껏 치장할 수도 있다 탈만들기는 김춘영가옥에서 진행됐다. 여러 종류의 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한지와 색연필 등으로 나만의 탈을 만들 수 있다. 어린이들은 주저 없이 무한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반해 성인들은 손길이 좀 무겁다고는 한다. 하지만 정해진 답이 없으니 즐겁게 색칠하고 종이를 오려붙여 만들면 된다. 못나고 우스꽝스러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든 탈을 쓰고 전래놀이에 참여할 수도 있다. 관객과 함께 사물놀이를 체험해볼 수 있는 1인극 공연 ‘비 바람 번개 구름’이 진행되는데, 아이들과 함께하면 더욱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김춘영가옥에서 진행되는 탈만들기 체험, 앞마당에서는 전래놀이 체험이 이어진다 이어 참여하게 된 남산골 양탕국(커피) 체험. 체험 장소인 남산국악당은 금방이라도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애신 애기씨와 유진초이가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복을 입고 마시는 양탕국도 좋았지만 개화기 의상도 썩 잘 어울리겠구나 싶었다. 남산국악당 야외전시실에서 양탕국을 제조하고 있다 양탕국은 말 그대로 서양의 탕국이란 뜻이다. 검은색에 씁쓸한 맛이 나는 커피가 탕약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1890년 즈음으로 보고있다. 고종도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접한 ‘가비차...
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8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덕수궁 광명문’

지난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건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일혈로 알려졌지만 순식간에 ‘독살설’이 매서운 꽃샘바람처럼 온 나라에 퍼졌다. 비록 일제에 의해 황실이 아니라 왕가로 격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하늘같은 존재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압제에 숨죽이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일었고, 승하 후 40여 일 만에 황제의 운구 행렬은 함녕전으로부터 광명문을 통해 남양주 홍릉으로 향했다. 제100주년을 맞은 3.1절 오후 덕수궁에서는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가 열렸다. 황제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광명문은 고종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정문으로, 고종이 승하한 후 1938년 강제 이건되었다가 80년 만에 원래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광명문 복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민들 이전영 문화재청 복원정비과장의 경과보고로 시작된 기념식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훼손 변형한 광명문이 제자리를 찾는 오늘은 뜻깊은 날”이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자 자주주권을 지키려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고종황제의 이상이 서려 있는 이곳”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제가 개칭해 쓴 ‘덕수궁’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경운궁’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기념사를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경운궁 현판. 경운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덕수궁의 옛 이름 현판으로 고종의 어필이다. 1593년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삼았던 이 궁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며 근대화를 위한 열의를 다졌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황룡포를 입은 고종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100년 전 근대 교육 발자취를 따라 걷는 정동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3)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경성재판소를 활용 중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른쪽 주차장 입구 쪽으로 나오면 길가에 높고 번쩍거리는 건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작고 아담한 건물 하나를 굽어보고 있다. 빌딩의 철과 유리에 대비되는 돌과 벽돌로 만든 이 건물의 정체는 바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가정집 벽을 허물고 만든 교실에 2명의 학생이 입학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을 하사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을 서양의 언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가정집에서 서양식 단층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학생들이 계속 늘어나서 공간이 부족해졌다. 결국 1916년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된 건물을 새로 짓게 된다. 그러면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을 비롯해서 한글학자 주시경,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에서 지식을 쌓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 배재학당을 승계한 배재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1984년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현재는 배재학당의 동관만이 남았고, 역사박물관으로 변신한 상태다. 작은 종이 매달려있는 현관을 지나서 내부로 들어가면 배재학당의 역사와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울러 예전 교실을 그대로 복원해놨고 한쪽 구석에는 당시 입었던 교복과 교모가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썼던 피아노와 타자기, 인쇄기 등을 볼 수 있다. 규모는 비록 크지 않지만 배재학당이 존재했던 시기의 역사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학교 건물답게 외관은 단출하고 밋밋한 편이라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의 화려한 현관과 위압적인 외관과 여러모로 대비가 된다. 이 건물의 특징을 꼽자면 ...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건축물

덕수궁 석조전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4) 석조전 덕수궁 대한문으로 들어가서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가면 돌담길이라는 이름의 카페 겸 선물 가게가 있다. 연못과 접해있기 때문에 고즈넉한 덕수궁 안에서도 더 없이 조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연못 구경을 하고 함녕전을 끼고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이 정관장과 헷갈려하는 그 유명한 정관헌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정원처럼 꾸며진 곳이 나오는데 꽃과 나무를 구경하다보면 회백색의 기둥과 난간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무와 기와, 벽돌로 만든 전통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 건물은 1910년 완공된 석조전이다. 이곳이 대한민국의 덕수궁이라는 사실을 머리에서 지워버린다면 한 가지 생각 밖에는 안 떠오를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 신전이네.’ 석회암으로 만든 굵은 원형 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삼각형의 박공과 난간의 형태는 영락없이 TV에서 봤던 그리스 신전과 판박이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전의 석상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석조전 1층 중앙홀 ‘안은 유럽의 궁궐이군.’ 한옥들로 가득한 덕수궁 안에 겉은 그리스 신전이고 내부는 유럽의 궁궐처럼 꾸며진 석조전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1897년 2월, 고종은 약 1년간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서 경운궁으로 향한다. 청일전쟁 이후 기세가 등등했던 일본은 러시아라는 강적에게 밀려 숨을 죽인 상태였다. 고종은 그 틈을 타서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데 연호를 따서 광무개혁이라고 부른다. 석조전의 건축은 개혁 정책 중 하나였다. 조선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에게 서구 건축물을 보여줌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영국인 고문 하딩의 건의로 190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석조전의 내부는 19세기 유럽의 궁궐이나 귀족의 저택처럼 꾸며졌다. 1층과 2층으로 나눠진 석조전 내...
경복궁 집옥재

고종은 궁궐 속 작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었을까?

경복궁 집옥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0) 경복궁 속 작은 도서관 ‘집옥재’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경복궁은 숨겨진 보물들이 많은 곳이다. 비록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지만 경회루만큼 아름다운 향원정과 을묘왜변의 비극이 서려있는 건청궁, 그리고 북쪽 끝에 자리 잡아서 늘 한적한 집옥재가 바로 그곳이다. 집옥재는 경복궁 안의 다른 전각들과는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이 간다. 옥을 모으는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원래는 창덕궁의 함녕전 근처에 있다가 1891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고종의 거처가 경복궁으로 바뀌면서 함께 이사를 온 것이다. 건물은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벽돌을 사용했고, 용마루에는 중국풍의 용 두 마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우측의 협길당은 전통적인 한옥 형태지만 좌측에 있는 팔우정 역시 유리창을 사용했다. 현판의 집옥재라는 글씨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적혀있다. 건물에 칠해진 단청은 궁궐임을 감안해도 굉장히 화려한 편인데 특히 내부의 지붕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정 가운데에 팔각형으로 솟은 공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청나라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고종은 이곳을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했으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후원 가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골치 아픈 일에 시달렸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용도는 왕실의 도서관이었는데 서구의 각종 문물과 기술을 소개하는 책들을 비치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구화를 진행하려던 고종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집옥재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벽돌과 유리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와 한옥이 만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옥은 지붕이 무겁기 때문...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 혼례, 20일 운현궁서 재현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서울시는 오는 20일 운현궁에서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국혼례를 재현하는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를 개최한다.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는 1866년(고종 3) 음력 3월 21일 거행된 15세의 고종과 16세의 명성황후 민씨의 국혼례를 재현하는 행사다. 이번 행사에서는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가 책명을 받는 ‘비수책(妃受冊)의식’, 고종이 왕의 가마인 어연을 타고 운현궁으로 행차하는 ‘어가(御駕)행렬’, 궁중에서 경사스런 잔치에 연예(演藝) 되었던 공연 ‘궁중정재(宮中呈才)’, 고종이 예비 왕비의 거처인 별궁에 친히 거동해 명성황후를 맞이하는 ‘친영(親迎)의식’ 등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질 예정이다. 비수책(妃受冊)의식은 왕비가 왕비 책봉을 위해 나온 정사(正使) 일행을 영접하고 책봉 교명을 받는 의식이다. 어가행렬은 고종이 가례를 위해 왕의 가마인 어연(御筵)을 타고 호위 관원 및 군사들과 함께 운현궁으로 행차하는 것으로, 고종이 인사동 사거리에서 운현궁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가행렬구간(☞ 이미지 크게보기 클릭) 궁중정재(宮中呈才)는 궁중잔치인 연향(宴享)에서 펼쳐지는 종합예술공연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를 축하하는 궁중무용 아박(牙拍)과 춘앵전(春鶯囀)을 시작으로, 북을 가운데 두고 추는 군무인 무고(舞鼓)까지 평소 접하기 어려운 궁중무용 공연이 진행된다. 친영(親迎)의식은 국왕이 왕비를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이번 행사에서는 궁중혼례 절차를 고증에 따라 재현하여 선보인다.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정영준 서울시 역사문화재과장은 “깊어가는 가을, 도심 속 아름다운 고궁 운현궁으로 나들이 오셔서 조선시대의 왕실 혼례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하게 느껴보시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 및 운현궁의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은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확...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2층 침실

덕수궁 석조전으로 ‘대한제국’ 역사여행 떠나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2층 침실 덕수궁 하면 돌담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구불구불 걷는 정취가 좋아 사람들이 사랑하는 길이다. ‘정동길’이라는 명칭 대신 ‘덕수궁 돌담길’로 불리는 이유도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덕수궁은,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대한제국의 정궁이다.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덕수궁을 황궁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에 가면 대한제국 당시 세워진 근대식 건물 석조전을 만날 수 있다.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완공 됐다.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조선의 전통 건축이 나무로 집을 짓는데 비해, 근대화의 상징으로 지은 이 집은 돌을 사용해 지어졌다. 조선을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만들겠다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반영했는데 안타깝게도 고종황제는 석조전에서 대한제국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빼앗긴 대한제국의 꿈을 우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이름이 바뀐 석조전에서 엿볼 수 있다. 1층 중앙홀 대한제국역사관을 관람하려면 덕수궁 누리집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지정된 시간에 1층에서 모여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는 동선을 따라 관람하게 돼있다. 석조전 중앙홀에서 촬영한 영친왕가 기념사진 1층은 중앙홀이나 접견실 등 공적인 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거실이나 침실 등 사적인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전통적인 궁궐의 경우 침전과 편전을 분리해두는 것에 비해 석조전은 두 곳을 한 곳에 두는 서양식을 따랐다. 중앙홀의 대리석 탁자를 비롯해 1911년 당시 가구 41점이 남아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홀의 대리석탁자다. 이 탁자는 1911년 영친왕이 당시 국내외 유력인사들과 기념촬영을 했던 그 탁자다.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에는 대리석 탁자를 포함하여 그 당시 가구 41점이 남아있다. 석조...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미리 걸어본 ‘고종의 길’…결코 짧지 않은 120미터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 고종의 길 ‘길’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 등이 다닐 수 있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한다. 길을 통해 사람들과 상품들이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이 전파된다. 그 밖에도 길은 누가 언제 걸었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따라서 기억되거나 되살아나기도 한다. 서울시가 8월에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이 그렇다. 이 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걸었던 길이다. 그리고 고종이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정세와 일본의 야심 때문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종은 개인적으로도 큰 아픔을 겪었는데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부인인 명성왕후를 시해한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다음해인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아관파천이라고 불린다. 1년의 피신 기간이 끝나고 고종은 환궁을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하지만 고종이 돌아간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당시에는 경운궁으로 불린 덕수궁이었다. 고종에게 경복궁은 너무 커서 지키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내가 피살되었다는 고통의 장소였다. 반면 덕수궁은 주변인 정동 일대에 외국 공사관과 학교, 교회 등이 밀집해 있어서 일본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덕수궁과 정동은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탑만 남아 있는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탑 밖에 남지 않은 구 러시아 공사관은 덕수궁의 선원전과 붙어있었고, 작은 길이 중간에 있었다. 선원전은 임금의 어전과 신주를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의 신문로를 가로질러 경희궁과 연결된 홍교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길 중간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의 본관 뒤편에는 비밀 통로가 난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아마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