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신들의 미인대회’

최순욱

발행일 2016.06.08. 15:30

수정일 2016.06.08. 17:49

조회 2,045

그리스 신화 속 미인대회를 묘사한 루벤스의 1636년 작품 `파리스의 심판`.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그리스 신화 속 미인대회를 묘사한 루벤스의 1636년 작품 `파리스의 심판`.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32) 항상 끝이 좋지 않은 미인대회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미스 USA 선발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군인이 우승했다고 한다. 여러 언론에 따르면, 영에의 주인공은 워싱턴DC 대표로 출전한 디쇼나 바버(26)로 미 육군 988부대 군수사령부의 병참 장교이자 미 상무부 소속 정보기술(IT) 분석관으로도 일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미스 바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년 365일 부대에서 생활하는 전형적인 군인은 아닌 듯하다. 그녀는 17살에 미 육군 예비군(United States Army Reserve)에 입대했는데, 미국 예비군에 입대한 사람들은 입대 후 현역과 동일한 10주 훈련 과정을 거친 뒤 예비군 부대에 편입되고, 이후부터는 매달 한 주 주말 동안만 군사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시간제 군인이라고 할까. 실제로 미스 바버가 장교로 복무중인 988부대도 예비군 부대이며 그녀가 이곳에서 일하는 시간도 한 달에 이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런 미인대회가 열린 적이 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후에 아킬레우스를 낳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자신을 초청하지 않은데 격분한 나머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써넣은 황금사과를 결혼식장에 집어던진 것이 발단이다. 이 사과를 누가 가질 것인지 올림포스의 가장 훌륭한 세 여신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다투게 되었는데, 결국 신들끼리는 누가 사과의 주인인지 합의하지 못하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부탁하게 된다. 심사위원이 파리스 하나요, 참가자가 세 여신인 ‘제1회 미스 올림포스’가 열린 셈이다.

그런데 이 미인대회는 영 끝이 좋지 않았다. 여신들은 앞다퉈 파리스에게 자신을 1등으로 뽑아 주면 엄청난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신들의 여왕인 헤라는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는 위대한 지혜와 무용을,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각각 보답으로 제시했다. 혈기 왕성한 파리스는 이 말을 듣고 멍청하게도 아프로디테를 승자로 선언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다 주지만, 하필이면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였다. 눈 멀쩡히 뜨고 있다가 아내를 보쌈당한 메넬라오스는 격분한 나머지 자기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함께 수많은 영웅과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침략하게 된다. 10년이 넘는 전쟁 끝에 트로이는 결국 패배해 멸망당하니, 그저 얼굴과 몸매의 아름다움만 좆는 것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이런 이야기 때문인지 이번 미스 USA의 향후 행보 역시 끝이 아주 좋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저런 미인대회가 그 자체로 성 상품화를 조장할뿐더러 특정한 미의 기준을 사회에 강요한다는 비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물론 ‘군인’이라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는 여성이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국가의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 자체가 꽤나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경험상 이 여성이 기존과는 뭔가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상업성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 ‘군복이 더 섹시한 여군’ 따위로 한동안 광고 등으로 끝없이 소진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절대 그렇게 되라는 것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영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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