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영화 대신 택한 ‘열 가지 즐거움’

김별아(소설가)

Visit623 Date2016.05.13 16:10

정자ⓒ뉴시스

깊은 절에서 한 해가 저무는 날, 눈보라는 골짝에 흩뿌리고 차가운 밤기운에 스님은 잠들었을 때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일.
봄과 가을 한가로운 날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몸과 마음은 가뿐하고 시상이 솟아오르는 일.
굳게 닫힌 문에 꽃은 떨어지고 주렴 밖에선 새가 우는데, 술동이를 열자 그 정취가 읊고 있던 시구와 맞아떨어지는 일.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어른과 젊은이 한자리에 모여 한 잔 마시면 한번 읊는데 어느새 시집 한 권이 만들어지는 일.
아름다운 밤 고요하고 맑은데, 밝은 달빛이 마루로 새어들고 부채 소리에 맞춰 글을 읽으니 소리 기운이 씩씩하고 힘 있는 일.
산과 시내를 돌아다녀 말도 고달프고 하인도 지치는데, 안장 위에서 쉬엄쉬엄 읊은 구절이 작품이 되어 호주머니 가득하게 되는 일.
산 속에 들어가 책을 읽어 목표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마음 가득 기쁘고 기운이 넘쳐나 붓놀림이 신들린 듯하는 일.
멀리 살던 좋은 친구를 뜻하지 않게 만나 그간의 공부를 자세히 묻고 새로 지은 작품을 외워 보라고 권하는 일.
좋은 글과 구하기 힘든 책을 친구가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빌려와 허겁지겁 포장을 풀어 여는 일.
숲과 시내 건너편에 친한 친구가 살고 있는데 새로 빚은 술이 익었다고 알려 오며 시를 부쳐 화답하기를 요청하는 일.
— 김창흡의 《삼연집(三淵集)》 중 <예원십취(藝苑十趣)> 전문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23

조선 후기의 문장가 김창흡은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서울을 떠나 포천 영평으로 가서 영평팔경 중 하나인 금수정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500여 편의 시를 짓는다. 좌의정 할아버지에 영의정 아버지를 둔, 말마따나 원조 ‘금수저’였던 그가 화려한 만큼 위험한 세상의 영화 대신 택한 ‘열 가지 즐거움’은 하나같이 소박하나 예스럽다.

쫓기듯 전쟁처럼 살아내느라 별달리 즐거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될까, 인용이 좀 길기는 하지만 하나하나 문장이 아름다워서 그대로 옮겼다. 모두가 향긋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잔잔한 미소를 떠오르게 하는 일들이다. 열 가지 중 네 가지 즐거움은 책과 관련된 것이요, 여섯 가지는 시를 짓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사시사철 무쌍하게 변하는 자연은 책과 시를 더 깊이 읽고 쓰는 배경이 되고, 취향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벗은 읽기와 쓰기가 쓸쓸한 자기만족이 아닌 풍부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조건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평범한 사람이 쉬이 따라 하기 어려운 신선놀음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함께 즐길 벗이 있다면, 그조차 집착은 아닐 수 있도록 자연의 순리를 양순히 따른다면, 누구라도 자기 삶에서 열 가지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아무리 부박한 세상이라도 최소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려면, 열 가지 즐거움쯤은 반드시 가져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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