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서양화가의 옛집, 고희동 가옥 탐방

시민기자 김종성

발행일 2016.04.29. 14:15

수정일 2016.04.29. 16:45

조회 1,378

춘곡의 작업실 풍경

춘곡의 작업실 풍경

햇살좋은 날 창덕궁 산책에 나서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종로구 원서동이다. 창덕궁과 옆구리를 맞대고서 궁궐 돌담을 따라 난 아담한 동네. ‘럭키 전파사’ 등 향수를 일으키는 정겨운 가게 간판에서 한국미술박물관, 궁궐의 궁인과 일반인들이 함께 썼다는 옛 빨래터가 있어 산책하는 재미가 있다.

정겨운 럭키전파사 간판(좌), 물이 마르지 않은 빨래터(우)

정겨운 럭키전파사 간판(좌), 물이 마르지 않은 빨래터(우)

궁궐 옆 동네라서 그런지 한옥이 많은 데, 그 중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春谷) 고희동의 거처였던 옛 집이 있다. 그의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한 공간이다. 한식과 일본식 그리고 서양식 주거문화의 특징이 고루 녹아 있는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등록문화제 제 84호)다. 1918년 일본유학(동경대 서양미술 전공)을 마치고 돌아온 춘곡이 직접 설계해 지은 후, 4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춘곡 고희동 가옥 마당과 입구 전경

춘곡 고희동 가옥 마당과 입구 전경

열린 대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자박자박 경쾌한 발소리가 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간 한옥 집 나무 바닥은 참 부드럽고 폭신해 인상에 남았다. 좁고 긴 복도와 유리문, 실내로 들어온 툇마루와 대청, 개량 화장실은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좁은 복도, 유리문, 실내로 들어온 툇마루 등 근대 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좁은 복도, 유리문, 실내로 들어온 툇마루 등 근대 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집은 1965년 춘곡이 세상을 뜬 뒤 소유주가 바뀌면서 한때 헐릴 뻔했는데, 시민들의 노력으로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2008년 종로구청이 사들여 보수공사를 한 후, 2012년 전시회가 열리면서 일반 공개가 됐다. 이제는 시민 누구나 집 안으로 들어가 춘곡의 작품과 자취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지긋한 문화 해설사 한 분이 가옥 안에서 근무하며 춘곡의 삶과 작품들을 설명해 주셨다.

구한말 역관(통역관)이자 개화 지식인이었던 고영철의 아들 고희동은 십 대 시절 프랑스 선교사가 건립한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서양미술을 접하게 된다. 1909년 한국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한다. 가옥에 전시된 그의 작품을 보면 전통적인 동양화 혹은 수묵화에 서양화 기법과 색채를 결합한 ‘수묵 채색화’가 대부분이다. 고려청자가 떠오르는 청자색 등 보기 드문 색채로 물든 수묵화가 말 그대로 이색적이다.

춘곡의 수묵채색화를 설명하고 있는 문화해설사

춘곡의 수묵채색화를 설명하고 있는 문화해설사

몇 점 안되는 유화 작품 가운데 현재 일본에 있다는 일종의 동경대 서양미술과 졸업작품집이 눈길을 끌었다. 작품집 겉면에 도포에 큰 갓을 쓴 춘곡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식민지 시절이다 보니 그런 겉표지가 그려진 졸업작품집이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일종의 자화상이기도 한 겉표지 그림을 유심히 보다보면, 예술가만의 자존심과 고집이 느껴진다. 1920년 대 중반 이후 서양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시대 상황에 한계를 느끼고 한국화로 전향했다고.

오른쪽 그림이 춘곡의 동경대 졸업작품집 표지 그림

오른쪽 그림이 춘곡의 동경대 졸업작품집 표지 그림

고희동은 이 집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해방 이후에도 문화예술인과 교류하고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휘문, 중앙고보 등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대한민국 미술협회장, 예술원장 등을 맡으며 미술 행정가를 하기도 했다. 다만, 1940년 조선남화연맹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해 벌어들인 판매 수익금 전액을 일제에 헌납한 일로 해방 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원서동 마을버스 정류장

원서동 마을버스 정류장

춘곡 고희동 가옥, 최순우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등은 등록 문화재이면서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과 기증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지키는 활동)으로 시민문화유산이 된 좋은 사례다. 시민들이 자칫 사라질 뻔한 문화재를 지켜낸 것이다. 이번 주말은 미세먼지 ‘보통’ 수준이라고 하니, 원서동 나들이를 권하고 싶다.

원서동에서 보이는 창덕궁의 멋들어진 회화나무

원서동에서 보이는 창덕궁의 멋들어진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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