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지금 위안이 필요하다

최경

Visit541 Date2016.04.07 15:20

벚꽃ⓒ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0) 포물선을 그려주던 의사처럼

한 때, 지독한 몸살기가 돌면 E씨가 무작정 찾아가는 동네 병원이 있었다. 흰머리 성성한 수더분한 이웃집 아주머니 같던 의사선생님은 청진기로 진찰을 하고 압설자로 입안을 들여다본 뒤 영어로 된 의학전문용어로 증상을 기록했다. 거기까지는 보통의 내과 의사들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환자에게 포물선 모양의 그래프 하나를 그려 보인다는 것이다.

“한번 시작한 몸살감기는 꼭 포물선을 그리면서 지나가게 돼 있어요. 갑자기 씻은 듯이 나을 순 없는 겁니다. 과정은 반드시 겪어야 해요. 쑤시고 열나고 목 아프고 기침하고 콧물 나오는 증상은 거쳐야 한다는 뜻이에요. 약 먹고 주사 맞는 건, 단지 포물선 높이를 조금 낮춰주는 것뿐이에요.” “….네 ”

그렇게 의사선생님은 E씨가 갈 때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포물선을 그려보이곤 했다. E씨는 몸살감기를 앓는 내내 그 포물선을 떠올리면서 지금 내 몸의 상태가 포물선의 오르막길인지, 정점인지, 아니면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인지 판단하게 되더라고 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그림이 적잖이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때로 온 몸을 휘감는 아찔한 통증이 감기바이러스로 인한 몸살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증세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병원을 찾아가기도 했단다. 의사선생님이 포물선을 그려주면 어쩐지 금방 좋아질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엔 포물선의 과정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마음을 다진다 해도 시련의 힘겨운 과정을 견디려면 무언가 위로될 만한 것, 혹은 비상약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E씨에게 의사선생님이 그려주는 포물선 그래프는 말하자면 비상약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10년도 넘게 찾아갔던 동네 내과가 어느 날, 가보니, 문을 닫았더란다. 꽤 연세가 지긋했던 의사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아니면 은퇴를 한 것인지 사정을 파악할 길은 없었단다. 그저 환자와 의사 사이였으니, 개인적인 연락처를 알리 만무하다. E씨는 자신에게 더 이상 포물선 그래프를 그려줄 의사가 없다며 몹시 섭섭해 했다. E씨에게 필요했던 건 의사선생님의 그림이 아니라, 마음의 위안이 아니었을까. 아픔의 한가운데에서 겪을 것은 꼭 겪어야만 벗어날 수 있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도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징표였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E씨가 열망과 흔들림, 희망과 좌절이 한데 뒤섞여 살아가던 20대 청춘시절이었으니 더더욱 그 의사선생님의 포물선 그림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겨우내 길고 긴 인내의 과정을 뚫고 봄날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꽃들도 포물선의 정점으로 향해 가고 또 내리막길을 거쳐 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삶은 포물선이다. 내 삶을 흔드는 번뇌도 고통도 절망도 포물선이다. 다만, 그 포물선의 높이가 어느 만큼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무 높은 것이라면 그 높이를 낮춰줄 약이 필요하다. 아니면 위안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E씨가 무작정 찾아갔던 의사선생님처럼, 우리 모두는 그런 누군가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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