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뒤면 사라질 '옥바라지 골목'

시민기자 이현정

발행일 2016.01.12. 15:50

수정일 2016.10.11. 15:13

조회 12,387

함께 서울 착한 경제 (40) 재개발, 재건축? 도시재생?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인기만큼이나, 옛 골목에 대한 향수도 깊어진 듯 하다. 지지고 볶으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그 시절 그 골목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고 비좁은 골목들이 눈길을 끈다. 이렇듯 오래된 골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서울에는 여전히 사라져 가는 골목이 더 많다. 그중 한 곳, 이제 몇 달 뒤면 재개발로 사라지게 될 골목을 찾아가 보았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애환이 서린 골목,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옛 서대문 형무소 앞 옥바라지 여관 골목이다.

옥바라지 골목 풍경

옥바라지 골목 풍경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골목, ‘옥바라지 골목’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일대는 굴곡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인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던 자리이자, 1897년 독립문이 세워진 곳이다. 사대외교의 상징이라 하여 철거된 영은문 자리엔 독립문이 세워졌으며,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개축해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했던 것. 하지만 1979년 고가도로 건설로 북서쪽으로 70여 미터 떨어진 현재의 자리인 독립공원 안으로 옮겨오게 되었으며, 남겨져 있던 영은문 기둥 초석도 함께 옮겨왔다. 사라진 독립관도 복원했다.

독립공원은 서울구치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1908년 통감부(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설치한 감독기관)가 경성감옥을 설치한 이후, 서대문감옥으로,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른 악명 높았던 곳이다. 해방 후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뀌며 격동의 현대사 속에 많은 시국사범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기도 하다. 1987년 서울 도심의 팽창에 따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였으며,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대부분 건물은 철거되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수감되었던 일부 옥사와 사형장 등 11개 동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남겨져 있다.

서대문 역사박물관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서대문 역사박물관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독립문에서 본 무악재. 오른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1979년 독립문에서 본 무악재 전경. 오른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경성감옥이 들어서며 맞은편 인왕산 자락에는 자연스럽게 옥바라지 여관 골목이 형성됐다. 당시 면회 온 가족들로 북적여 방 한 칸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 이혜련 여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 가족들도 이곳에서 심부름하며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백범일지 속 강인한 어머니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여사 역시 이 골목에 머물렀다.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담 더 감사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 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곽낙원 여사의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이 대화 속 처와 장녀 화경이 기다리고 있던 곳 또한 옥바라지 골목이었으리라. 일제 강점기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출소 후 여관에 잠시 머물며 몸을 추스른 후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여관에서 절명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하니, 이곳 옥바라지 골목은 독립운동가들과 가족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옥바라지 골목 풍경

옥바라지 골목 풍경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속 그 동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 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 골목으로 걸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배경이 되는 동네도 바로 이곳이다. 영천 전차 종점이 독립문 사거리 근처였다 하니, 동네 아이와 감옥소 마당으로 놀러 가던 길, ‘복작한 골목과 층층다리를 지나 전차 소리가 들리는’ 그 길이 바로 옥바라지 골목이었으리라. 아이스케키를 사러 전차 종점으로 내달리던 때도, 엄마와 야시장을 다녀올 때도 이곳 옥바라지 골목을 거쳐 갔을 것이다. 지금은 무악동이지만, 1975년 종로구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이 일대가 모두 현저동이었다 하니, ‘현저동 46번지의 418호’ 소설 속 주인공의 집은 아마 옥바라지 골목 위쪽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옥바라지 골목 풍경

옥바라지 골목 풍경

맞은편 독립공원이 역사가 박제된 채 기념물처럼 남겨진 공간이라면, 이곳 옥바라지 골목은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듯 근현대사 속 파란만장했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개발로 하나둘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이곳 옥바라지 골목도 이제 철거를 앞두고 있다. 독립문 사거리를 병풍처럼 둘러싼 아파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예정이다. 이미 80% 이상 이주가 진행되었으며, 지난해 6월 ‘무악 제2주택 재개발정비구역’ 관리처분계획인가 승인을 받아 철거를 앞둔 상황이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관리처분 무효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는 하나, 개발의 흐름을 거스르기엔 역부족인 듯싶다.

전면 철거와 도시 재생 중 어떤 방식이 옳은 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전면 철거와 도시 재생 중 어떤 방식이 옳은 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곳 옥바라지 골목뿐 아니라 서울의 많은 골목이 재개발, 재건축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최근 도시재생으로 골목도 살리고 서민들의 주거권과 생활권도 보호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지만, 여전히 전면 철거 후 재개발하는 방식이 더 많다. 서민들, 세입자,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터전과 함께 역사가 있는 골목도, 골목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조합의 사유재산인 만큼 주민 다수가 선택한 개발 방식을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하긴 힘들 것이다. 다만, 함께 살아가는 서울을 위해 좀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많은 뉴타운 재건축 예정지들이 뒤늦게 그 실상을 파악한 주민들의 반대로 도시재생방식으로 돌아선 것을 보면, 애초에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이 좋을지,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 주거 환경을 정비하는 도시재생사업 방식이 좋을지, 해당 지역 주민들 스스로 삶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방식이 과연 무엇일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1월이 지나기 전에, 본격적인 철거에 들어가기 전에 옥바라지 골목을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독립문 3번 출구 옆 골목 안쪽으로 남겨진 층층 계단을 오르며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골목 위 허물어질 듯 남겨진 개량 한옥 중엔 김구 선생의 모친이,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하던 그 여관 모습이 남겨져 있지 않을까? 천천히 돌아봐도 20~30분이면 충분하다. 빈집들이 태반이고 뒹구는 쓰레기들로 유쾌한 골목길 여행은 아닐지 몰라도, 왠지 그냥 그렇게 사라지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될 듯하다. 골목의 흔적들은 사라져도 그 역사만은 기억하겠노라는 다짐 정도는 해둬야겠다.

이현정 시민기자이현정 시민기자는 '협동조합에서 협동조합을 배우다'라는 기사를 묶어 <지금 여기 협동조합>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협동조합이 서민들의 작은 경제를 지속가능하게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녀는 끊임없이 협동조합을 찾아다니며 기사를 써왔다. 올해부터는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자리 잡은 협동조합부터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자활기업에 이르기까지 공익성을 가진 단체들의 사회적 경제 활동을 소개하고 이들에게서 배운 유용한 생활정보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그녀가 정리한 알짜 정보를 통해 '이익'보다는 '사람'이 우선이 되는 대안 경제의 모습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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