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가야하는 길, 슬프지 않아요"

최경

발행일 2015.12.24. 15:02

수정일 2015.12.29. 13:50

조회 997

성탄ⓒ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5)

그 겨울, 한 사람이 병원 침상에서 나지막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그 곁에 귓속말로 다정하게 마지막 기도와 작별인사를 건네는 외국인 수녀 한 분. 그이는 70년대 초부터 한국에 들어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의료 활동을 해온 의사이자 성직자, 메리 수녀였다.

지금이야 ‘호스피스’가 어떤 뜻인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낯선 단어였다. 당시 환갑을 넘긴 메리수녀는 바로 임종을 앞둔 말기환자들이 편안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가정방문 호스피스 의사 1호였다. 낡은 왕진가방 하나를 들고 매일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찾아가는 메리수녀는 말기환자들에게 치료가 아닌, 극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강력진통제를 처방했다.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환자가 주변을 정리할 수 있고, 가족들과 작별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죽음 역시 인생의 중요한 과정이며, 누구나 편안하게 생을 마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바로 호스피스의 출발이기도 하다. 나는 메리수녀를 취재하면서 여러 말기 환자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호스피스 의사 메리수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영등포 뒷골목,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하는 작은 병원이었다. 의사의 손이 늘 모자라는 이곳에서 그이는 가난하고 기댈 곳 하나 없는 환자들을 진료해오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김씨도 메리수녀의 진찰순서를 기다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눈에 봐도 김씨의 상태는 나빠 보였다. 오래전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는 김씨는 가쁘게 숨을 쉬었고, 배는 복수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엑스레이 검사결과를 보며 진찰을 하던 메리수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김씨는 뭔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메리수녀는 황급히 자리를 옮겨 전화를 찾았다. 좀 더 큰 병원에 김씨의 입원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김씨는 어쩐 일인지 병원에 입원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메리수녀는 김씨를 설득했다.

“교도소 아니에요. 거긴 갱생원 같은 곳이 아니에요. 좋은 병원이에요. 지금 검사결과가 조금 안 좋아요. 빨리 가야 해요.”

“내일 갈래요. 그냥.... 복잡하게 뭘...”

김씨는 끝내 입원을 다음날로 미루고 진료실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워했고, 얼마 걷지 못하고 숨이 차 한참을 쉬어야 했다. 몸 상태가 이지경인데 대체 왜 입원을 미루는 걸까. 지켜보는 제작진은 그가 조마조마했다.

“그냥 오늘은 내가 정리를 좀 할 게 있어요...”

힘겹게 말을 마친 그는 노점에서 바나나 천원어치를 사들고 3분도 채 안 걸리는 골목을 30분 넘게 걸어갔다. 김씨가 머물고 있는 곳은 일세를 내는 허름하고 비좁은 쪽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방에 들어가 겨우 앉은 그는 먹는 것도 힘겨운 듯 바나나 한 개를 한참동안 먹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신문지 한 귀퉁이를 찢어 제작진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조카 연락처라고 했다. 어쩌면 이 기찻길 옆 낡은 쪽방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흘 정도 지난 뒤, 제작진은 김씨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약속대로 다음날 입원을 했고, 그곳에서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간을 비롯해 온몸에 퍼진 암이 뼈까지 전이돼 더 이상 어떤 치료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김씨는 메리수녀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족과 연락을 끊고 홀로 지냈을 김씨, 다만 며칠이라도 메리수녀와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외롭지 않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호스피스 의사, 메리수녀가 수십 년 동안 돌봐온 환자들은 김씨처럼 얼마지 않아 이 세상에 없는 이가 되곤 했다. 아무리 성직자라 해도 정성으로 돌봐온 이들이 홀연히 먼 곳으로 떠날 때마다 마음이 힘들고 무겁지 않을까? 그 질문에 메리수녀의 답은 이러했다.

“슬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누구든 가야하는 길이니까요. 그분은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가지 않고 옆에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편하게 가셨어요. 우리 다 똑같은 길을 가고 있어요. 단지 먼저 가신 것뿐이라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가야 돼요.”

메리수녀를 만난 그해 겨울은 내게 유독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호스피스 의사로 수많은 임종환자들을 돌봤던 메리수녀는 자신의 고향 호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새 팔순이 가까웠을 메리수녀를 새삼 기억하며 이렇게나마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고 싶다.

“메리 수녀님.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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