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란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12.04. 15:37

수정일 2015.12.29. 13:12

조회 1,216

노을ⓒ뉴시스

태평한 세상을 살아감에는
몸가짐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 좋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원만히 살아가야 하며
말세에는 방정함과 원만함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
착한 사람은 너그럽게 대해야 하고
악한 사람은 엄하게 대해야 하며
보통 사람들은 너그럽고도 엄하게 대해야 한다.
--《채근담》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2

이제 조금쯤은 살아가는 법을 알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가까워지니 하늘의 뜻까지야 알지 못하더라도 세상살이의 이치쯤엔 어섯눈을 떠야 마땅할 텐데, 모르겠다. 갈수록 더 모르겠다. 본디 자존을 내세우며 오만불손하여 세상을 사는 이치니 법칙이니 하는 것들은 귓등으로 들었는데 정말 처세술이 필요한 시기가 왔나 보다. 난세는 과연 어떻게 견뎌야 하나? 태평성대에도 살펴야 할 몸가짐새가 있는지, 말세라면 어찌 처신해야 할지 궁금해졌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뭇 베짱이 두둑했다. 그들의 유행가를 요즘 식으로 풀어 보자면 대략 이렇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휴식하지. 내 손으로 내가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는데, 임금이 나랑 무슨 상관?” 임금의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을 만큼 권력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던 시절, 그런 때가 바로 태평성대였다. 《채근담》에서 가르치는 처세는, 그럴수록 스스로 말과 행동을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경거망동이야말로 평화를 해치는 악재이므로. 반듯한 사람들은 패악을 부릴 일이 없기에 평화는 통제 없이도 마땅히 유지되었다. 말하자면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어지러운 세상, 난세에는 가능한 한 원만하게 살라고 한다. 원만함이란 결국 성격이 모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것인데,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비겁한 사람들을 위한 덕목이다. 난세에 도리어 영웅이 났다. 영웅이야말로 원만함과 정 반대편에 있는 강강하고 까칠한 사람이다. 영웅의 자질을 가진 자도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마을 축제의 힘겨루기 대회 우승자쯤으로 살다 죽었을지 모르니,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말세, 이른바 끝판왕, 정치와 도덕과 풍속이 아주 쇠퇴해 끝판이 다 된 세상에서는 이런 것 모두가 필요 없을 듯 다 필요하다고 한다. 그때야말로 세상의 기준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니 스스로의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반듯하고도 너그럽게 환란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태평성대가 아니라면 어느 시대인 듯 쉬웠으랴. 역사를 읽다 보면 난세와 말세를 막막하게 견뎠던 사람들의 삶이 상상되어 먹먹해지곤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쟁과 가난과 학정을 두루 겪어낸 사람의 한 생애는 어떤 의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을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시대에 희생된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처세란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착한 자에게 너그럽고 악한에게 엄하다는 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연민과 용기를 말한다. 아무리 난세일지라도 사람에 대한 연민과 용기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둠 속의 마지막 등대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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