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최순욱

발행일 2015.10.21. 16:19

수정일 2015.11.26. 13:32

조회 2,393

푸루샤 숙타가 포함된,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의 19세기 필사본

푸루샤 숙타가 포함된,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의 19세기 필사본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3) 기록의 무서움: 의도와 결과

리그베다(Rig Veda)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도의 문헌이자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엄청나게 많은 신들과 영웅, 현자들에 관한 1028개의 아름다운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기원전 1500~1200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1) 리그베다에는 우리가 ‘카스트’라고 부르는,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관한 ‘푸루샤 숙타(Purusha Sukta)’라는 시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은 이를 한번 살펴보자. 참고로 인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분제도를 산스크리트어로 색(色)이라는 뜻에서 ‘바르나(Varna)’라고 부른다.

푸루샤는 천 개의 손과 천개의 눈, 천 개의 다리를 가진 최초의 거인, 또는 존재의 근원이다. 푸루샤는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열 손가락만큼 세상을 더 채웠다. 푸루샤는 이미 있었던 모든 것이거니와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는 불멸의 군주이면서도 여전히 음식을 섭취해 성장한다.

모든 생명은 푸루샤의 1/4로 만들어졌고, 천상의 영생은 그의 3/4이다. 3/4를 통해 프루샤는 위로 올라가지만 1/4은 다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푸루샤는 모든 곳을 넘나들며 존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라고 하는 원초적 존재가 태어났고, 비라즈에서는 다시 푸루샤라고 하는 원초적인 인간이 태어났다.

신들은 거인 푸루샤를 제물로 제사를 치렀다. 이 제물에서 하늘과 땅의 짐승이 나왔고 시와 찬가, 운율과 다양한 제사형식이 나왔다. 또한 말과 암소, 염소, 양과 같이 한 쌍의 앞니를 가진 모든 동물이 나왔다. 그리고 신들이 나눈 거인 푸루샤의 몸 중에서 입과 팔에서는 각각 브라만(사제, 성직자)과 크샤트리아(무사·귀족)가, 넓적다리에서는 바이샤(농민·상인·공인 등)가, 발에서는 수드라(불결한 육체노동자, 노예)가 나왔다.

거인 푸루샤의 마음은 달이, 눈은 해가 되었다. 다시 그의 입에서는 신들의 왕인 인드라와 불의 신인 아그니가, 숨에서는 바람의 신인 바유가 나왔다. 배꼽에서는 공중(空中)이, 머리는 하늘이, 다리는 대지가 됐다. 신들은 이렇게 세상을 꾸몄다.2)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왜 수드라는 결코 브라만은커녕 바이샤조차도 될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신들이 나눠놓은 거인 푸루샤의 각각 다른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 입이 있는 머리에서 나온 신분은 사회에서 머리에 해당하는 일을, 팔에서 나온 신분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팔이 하는 일을 해야 하며, 발에서 나온 수드라는 천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시에서 바르나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분제도가 자리를 잡은 후대에 따로 삽입되었다고 본다.3) 한창 몸으로 세계를 만들고 있던 도중에 해당 내용이 삽입된 것이나, 이 부분의 문체가 다른 부분과 다르다는 것 등이 증거들이다.

범인은 누구일까. 고대 인도에서 리그베다에 실린 것과 같은 신에 관한 이야기는 당연히 성직자, 사제 신분인 브라만들만 만들고 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태초의 거인이 ‘제사’를 통해 죽어 온 세계가 되었다는 것 자체도 브라만들의 신성성과 권위를 돋보이게 해준다. 즉, 푸루샤 숙타 중 바르나의 기원 부분은 브라만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여기서 수드라 이하의 신분, 감히 닿는 것도 허락하지 못할 천민(不可觸賤民)인 ‘파리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의 찌꺼기에서조차도 나오지 못한, 도저히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의 권위가 막강했던 고대, 중세의 인도에서 파리아는 다른 신분들과 모든 면에서 격리되었고 다른 신분과 몸이 닿기만 해도 큰 벌을 받거나 죽음을 당할 수 있었는데.4) 푸루샤 숙타는 파리아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의 강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인도에는 아직도 세습 신분제가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다.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 12억 명 이상의 인구가 갖는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교류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비록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근 3000년 동안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강력한 신분제가 쉽게 사라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이다’라고 적고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사회 전체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기록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어떤 것에 대해 완벽하고 공명정대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속한 신분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브라만처럼, 특정한 목표를 상정하고 여기에 맞는 이야기를 골라 목표 달성에 용이한 방식으로 서술하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기록이 단정적인 하나가 되는 것은 좋지 않다. 서로 다른 관점과 목표의 여러 기록들을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 이야기의 내용과 내막을 파악하고 삶을 풍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근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밝혔다. 이것 역시 사실에 대한 단 하나만의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가 아닐까. 아니면 그때의 브라만들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던지.

1) https://en.wikipedia.org/wiki/Rigveda
2) http://sacred-texts.com/hin/rigveda/rv10090.htm , <인도신화(김형준, 2012, 청아출판사)> 등 발췌해 인용
3) https://en.wikipedia.org/wiki/Purusha_Sukta
4) https://ko.wikipedia.org/wiki/카스트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내가 놓친 서울 소식이 있다면? - 뉴스레터 지난호 보러가기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