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꼼꼼'하는 사람들의 뜻깊은 역사산책

꼼꼼한서울씨

발행일 2015.08.07. 15:20

수정일 2022.11.1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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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막 시작되던 지난 5월 말의 초여름, 서울시민모니터단 꼼꼼한 서울씨 70명이 광복 70번 째 해를 맞아 인왕산과 효창공원을 나누어 찾았습니다. 단순히 오르거나 쉴 공간을 넘어 인왕산과 효창공원은 우리의 근대역사를 품고 있었습니다. 꼼꼼한 서울씨들이 내손안에 서울 편집실로 보내온 후기 중 두 편의 이야기를 8월의 무더위가 찾아온 이제야 풀어드립니다. 인왕산은 영상으로 생생함을 더했습니다. 기다린 만큼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역사산책을 지금 시작합니다.


윤동주문학관에서 경교장까지, 역사가 깃든 도성구간 답사기 | 꼼꼼한 서울씨, 박칠성

윤동주문학관에서 경교장

나는 ‘꼼꼼한 서울씨’의 모니터의 일원으로 ‘광복 70주년 기념 역사현장 답사팀’으로 선정되는 행운을 얻었다. 5월 25일 오후 선정통보를 받고 답사일인 29일이 밝기까지 국민학생 시절 소풍날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시간들을 보냈다. 답사 당일도 얼마나 서둘렀던지 모임시간보다 1시간 전에 경복궁역에서 내렸다. 나는 건강도 챙길겸 별도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두 다리로 걸어 윤동주 문학관에 도착했다. 통인시장과 경복고교 그리고 청운중학교를 지나 자하문터널 통과 후 창의문공원에서 길을 건너면 되는 곳이었다.

문학관 제1 전시실에는 시인의 일생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자료와 친필원고 영인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발행 시집과 시인이 즐겨 읽었던 책들을 목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옛날 학창시절 읽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시집을 보고 잠시나마 옛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제2 전시실은 '자화상' 시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윗 천장을 개방하여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는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제3 전시실은 '닫힌 우물'이라는 주제로 시인의 일생과 시(詩)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다. 


윤동주 문학관(좌), `자화상`의 우물을 형상화한 제2 전시실(우)

윤동주 문학관(좌), `자화상`의 우물을 형상화한 제2 전시실(우)


문학관을 나와  목재계단을 밟고 오른 곳은 윤동주시인이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한양도성 인왕산코스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곳에서부터 돈의문까지 약 4km 도성구간 동안 신치호 해설사의 꼼꼼한 해설을 들으며 답사를 계속 진행했다.


꼼꼼한 서울씨와 한양도성 해설사로 활동 중인 신치호씨의 해설에 집중하고 있다

꼼꼼한 서울씨와 한양도성 해설사로 활동 중인 신치호씨의 해설에 집중하고 있다


이 코스는 600년 전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유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역사·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특히 도성을 따라  황토길을 걸을 수 있어 걷기에 더욱 좋다. 도성의 모양에 따라서 시대  구분이 가능하고, 어느 지방 백성들이 쌓았고 감독은 누구라는 표기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날씨는 더웠지만 맑은 하늘 덕분에 도성에 오르면 오를수록 북한산과 백악산 그리고 남산의 N서울타워 등 서울 내외산과 서울시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치마바위, 책 바위, 기차바위, 삿갓바위 등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이름에 걸맞는 형상 그대로였다.

하산을 하는 길에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던 권율 장군의 집터와 수령 420년이나 된 은행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 건물이 보였다. '딜쿠샤'라는 별칭을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곳은 광산업 및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UPI 통신사 특파원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3.1독립운동선언문을 국제 통신사에 널리 퍼뜨린 미국인 출신 테일러의 집이다.


1923년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지어진 딜쿠샤에는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중이다

1923년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지어진 딜쿠샤에는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중이다


이어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빨간 벽돌집, 홍난파(洪蘭坡) 가옥을 간단히 둘러보고 바로 경교장으로 향했다. 사적465호인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었으면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으로 종로구 새문안로 경희궁 옆 강북삼성병원 내에 위치해 있었다. 복원된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물과 관련 영상을 관람하며, 통일자주정부 수립을 위해  애썼던 선조들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총탄 자국이 재현된 경교장 2층 집무실 창문

총탄 자국이 재현된 경교장 2층 집무실 창문


마지막으로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중 서쪽에 위치해 일명 ‘서대문(西大門)’으로 알려진 '돈의문(敦義門)'을 찾았다. 1915년,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라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된 '돈의문'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본래 위치는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의 우리문화를 말살하고자 함부로 철거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아쉬움 때문에 분통을 감출 수 없었다.

이날 하루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신치호 해설사의 꼼꼼한 안내로 둘려본 답사를 통해 단순한 관광이 아닌 우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본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잊혀져가는 우리의 역사 문화를 일깨워 주는 현장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나의 답사기를 계기로 시민들도 역사현장에 방문해보시기를 권유하면서, 광복 70주년 기념 역사현장 답사 후기를 마친다.

도심 속 효창공원에서 독립정신을 느끼다 | 꼼꼼한 서울씨, 이주영

효창공원에서 독립정신을 느끼다

집이 삼각지 주변이라 효창공원이 매우 가깝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이나 용산공원, 한강시민공원, 남산공원은 자주 가지만 유독 효창공원은 근래 가본 적이 없다. 예전에 한번 들렀을 때, 어르신이나 노숙자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어 안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꼼꼼한 서울씨 역사현장답사에 효창공원이 포함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꺼이 신청하게 되었다.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백범기념관도 들러보고, 그동안 효창공원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


공원 왼편을 따라 백범기념관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4시부터 무료 음악회 행사가 있다는 소식에 마침 많은 방문객이 기념관 안에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비정기적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역주민에게 백범기념관을 방문하게하고, 문화혜택을 누리게 하려는 취지가 좋은 듯 하다. 기념관 입구 안내 데스크에서는 방문목적을 물어보고 전시물 사진을 찍지 않도록 안내를 하고 있었다.

기념관은 백범 김구의 삶과 행적을 따라 관람하며 자연스레 관람객이 김구 선생의 생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동학운동을 이끌고,  숱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임시정부의 주역이 되어 독립에 이바지한 생애가 귀중한 자료들로 남아 1, 2층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본군 중위를 처단하였다가 사형당할 뻔한 순간이나 이운환의 저격 사건, 일본군에 쫓기며 지냈던 중국에서의 오랜 망명 생활에 이르기까지 백범 김구의 일생은 거의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일제에게 겨레의 등불을 잃을 뻔했던 숱한 순간을 넘기고도 아이러니하게 동포의 흉탄에 돌아가신 장면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사건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백범 김구선생의 묘 표지석

백범 김구선생의 묘 표지석


기념관을 나서고 가까운 발치에 있는 백범 김구 묘역으로 향했다. 백범기념관의 2층에는 백범 김구 묘역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공간이 있었으나 무성하게 자란 나무에 가리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관람객들이 김구 묘역 근처에 몰려있었다. 제법 긴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묘 앞에 섰다. 비석에는 별다른 수식어도 없이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라는 간단한 비명만이 적혀있었다. 효창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그 곳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잠들어 계시는 듯 했다.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 곁에 묻히겠다는 유언에 따라 이 곳에 안장되어 있어 외롭지는 않으시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발길을 돌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가 묻힌 삼의사 묘역으로 향했다. 역시나 계단을 올라 접한 의사들의 묘는 단촐하였고 묘비명도 단순하게 적혀있었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중 봉분이 4곳이나 보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안내판에는 가장 왼쪽에 있는 묘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짜 묘)이며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하여 안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머리를 숙여 감사한 마음을 표할 수 밖에 없을 뿐이었다.

앞서 백범 묘역에서도 그랬지만 차마 묘소 사진을 찍기가 꺼려졌다. 안식 중이신 분들께 셔터 소리가 방해되진 않을까 하여,  고심 끝에 묘비만 찍고 묘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삼의사의 묘(좌), 임정 요인의 묘(우)

삼의사의 묘(좌), 임정 요인의 묘(우)


마지막으로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지사가 묻힌 임정 요인 묘역으로 향했다. 20년 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시다 이국땅에서 눈 감으신 분들의 묘이다.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하며 광복군을 창설하신 조성환 선생,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해 애쓰시다가 광복 직후 환국하지 못하신 채 중경에서 눈감으신 차이석 선생의 생애를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분 중 이동녕 선생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으나 조성환, 차이석 선생은 잘 알지 못하여 이번 기회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외곽 산책로 옆에 조성된 묘역에서 후손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함께 잠들어 계시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효창공원을 둘러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간절하게 독립을 갈망하고 또 그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당신께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없는데,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신 독립투사분들의  고매한 정신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만약 당신께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여 일제에 협력하고 변절했다면 다른 이들처럼 호사를 누리며 인생을 쉬이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나라를 찾아주는 것이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길이라는 단 하나의 신념이 있었기에, 그러한 고난의 삶을 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효창공원에 묻힌 순국선열들께서는 이젠 광복의 꿈을 이룬 대한민국에서 우리 후손들이 자유를 맘껏 누리고, 아름다운 강산을 대대손손 물려주기만을 바라고 계실 것이라고 믿는다.

글, 사진 제공 l 서울시민모니터 '꼼꼼한 서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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