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의 산책코스는 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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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447 Date2015.07.07 16:05

계단

과열된 삶을 식히는 거리 2.8km

시청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까지 2.8킬로미터. 따가운 햇빛과 도심의 소음을 벗어나 지하도상가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때, 아래로 난 계단이 보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시 생활. 과열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느끼고 싶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훌쩍 떠날 수는 없는 노릇. 거창한 여행이나 멋진 자연경관이 아니어도, 매연과 소음이 없는 곳에서라도 잠시 걸을 순 없을까. 높은 빌딩과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자동차들 사이에 트여있는 시청 광장은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여름엔 푸른 잔디밭으로 시민을 맞이한다. 꽉 찬 도시 속에 조그맣게 찍힌 푸른 점. 이곳 지하에 도시의 바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시청 광장 지하에서 시작하는 이 길을 통하면, 한 번도 지상으로 나가지 않고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걸을 수 있다. 도착지점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도 연결되어 있어 시청역부터 2호선을 따라 네 정거장 정도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길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지하도상가인 탓에 1시간 정도의 도보가 마냥 지루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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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는 을지문덕 장군의 그 을지가 맞다

시청 광장 지하부터 지하철역 2호선 을지로입구역까지 이어진 지하도상가는 현재 시티스타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구둣가게부터 헌책방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이곳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어느새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한다. 조선 시대까지 ‘구리개’로 불리던 을지로는 이후 ‘황금정’이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지만, 1946년 일본식 동명 정리 사업에 따라 을지문덕 장군의 성씨인 ‘을지’를 따서 지금의 지명을 얻었단다. 을지로입구역을 오던 방향으로 지나다 보면 을지입구지하도상가에 들어서게 되는데 오던 길에선 보지 못했던 사무기기 용품점이 몇 군데 보인다. 지상에 사무실이 많이 위치한 이곳은 20년 전쯤만 해도 사무기기 용품의 전문 상가라고 할 만큼 해당 품목을 취급하는 상점이 많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위치했던 가게의 직원과 맞은편 사장이 지금은 부부가 되어있는 소소한 러브스토리도 있을 정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제 사무기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가라고 보긴 힘들어졌다. 필요에 따라 직장인들을 위한 음식점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비 소식도, 교통사고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도심의 길을 걸을 때는 최소 5분에 한 번씩은 주변을 살펴야 한다. 앞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 때문이다. 앞만 보고 걸었는데 왜 괜스레 안정감이 느껴지나 싶었더니 지하에서는 사람 중한 줄 모르는 자동차를 피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벌써 20분 가까이 걸은 것 같은데 기분 나쁘지 않은 서늘함에 땀도 전혀 나지 않았다. 햇볕 아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갑작스레 내리는 비나 궂은 날씨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지하의 또 다른 묘미다. 아직 좀 더 걷고 싶긴 한 데 어딘지 모르게 배가 출출하다. 어디서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주위를 살펴보니 식욕을 돋우는 온갖 음식점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한식, 중식, 일식 없는 것 없이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에이드와 눈을 반짝이게 해줄 시원한 커피 한 잔, 비타민이 가득한 과일주스까지. 하나 손에 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겠다. 음료 한 잔 가격이 밥값을 맞먹는 지상과 달리 가격도 저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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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정글이 있었다

서울 한가운데, 그것도 지하에 정글이 있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을지로 3가를 지나 걷다 보니 웬 녹색 정글이 나타났다. 초록빛 조명 아래로 검은 야생 동물의 그림자가 드러난 이곳. ‘보는 즐거움과 상상의 설렘을 느끼며 걸어보라’는 안내문이 말해주듯 정글을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된 정글 테마존이다. 가만히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말 어디선가 원숭이와 치타,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비록 실제 정글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 길을 걸어 다니는 순간만큼은 스마트폰이 아닌 길 양쪽에서 있는 동물들에게로 눈길이 향한다. 그 사이 어느덧 을지로 4가에 도달했다. 이전보다 길이 조금 심심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이번엔 트릭아트가 시선을 뺏어 간다. 한글을 창제하시고 이루 다 셀 수 없는 업적을 남기신 세종대왕 님. 밤늦게까지 어두운 중에 책을 읽으시느라 눈이 나빠지시면 안 되니까. 조명등 삼아 성냥을 켜서 주위를 밝혀드려야지. 짓궂은 초등학생 몇몇은 벌써 그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난리다. 밋밋한 시멘트 바닥만 있는 줄 알고 땅바닥은 볼 생각도 안 했는데 이건 뭐지? 그 옛날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던 노란 구름을 꼭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트릭 아트로 구름 위에 올라 서울을 내 발아래 내려다보는 기분이란. 조금 전 초등학생더러 유치하다 생각한 게 언젠가 싶게 기념사진을 남겨 본다.

동대문 운동장이 사라진 그곳에도 추억은 남아있다

길다고 생각했던 지하도상가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마지막 코스가 아닐까 싶은 동대문 스포츠 지하도상가 지역으로 접어들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좌우로 늘어선 각종 스포츠 프로 구단의 유니폼들. 학창시절, 해 떨어질 때까지 늘 같이 공을 차던 친구들과 입을 유니폼을 맞추기 위해 방문했던 바로 그곳이다. 비록 동대문 운동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추억의 상점들은 지하로 내려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듯 하다. 학창시절을 떠올렸던 스포츠용품 상가를 지나자 어느새 2.8km의 지하 도보가 끝났다. 주변을 살펴보니,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을 이용하려는 승객들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좀 더 여유를 느끼고 싶어 DDP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지하도상가에 내려오기 전에 내리던 비는 오간 데 없고 탁 트인 광장에 햇볕이 가득하다. 얼추 한 시간, 스마트폰에 내장된 건강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해 보니 2.8km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온전히 걷기만 했을 뿐인데 이토록 머리가 상쾌해질 수 있다니. 도심 한복판, 그것도 위와는 판연히 다른 세계인 지하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아직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시청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 과열된 삶을 식히는 거리 2.8km를 걷는 동안 미열을 동반한 두통이 싹 가셨다.

출처 : 매거진 G:HA[지하] 3호(서울시설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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