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⑦ 도시와 문화, 홍대 그리고 문래동

내 손안에 서울

발행일 2015.06.03. 16:05

수정일 2015.06.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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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울, 서울 브랜드 이야기] 서울시가 도시브랜드 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시민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를 지난 2월 27일부터 오는 5월까지 개최합니다. 서울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시민들과 분야별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서울의 핵심 정체성을 도출한다는 취지로 서울의 산 과 강, 수도, 만남, 시장, 노래, 맛, 문화, 거리, 서울 속의 세계 등 10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이 토크 콘서트에 이코노믹 리뷰 기자가 직접 참석해 우리가 몰랐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서울 브랜드’의 이야기를 지상중계 합니다.

[우리의 서울이야기 제7화] 서울, 문화를 이야기하다

지난 4월 10일 저녁, 서울시민청 태평홀은 <시민 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에 참여하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콘서트에는 서울도시브랜드추진위원회 위원 및 관계자들과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한 서울 시민들, ‘서울얼굴가꿈단’ 단원들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제7화 서울이야기 에서는 명동시대부터 영화거리 충무로, 소극장 메카 대학로, 인디문화의 성지 홍대까지 살펴보며 서울의 문화 중심지에 깃든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서울이야기에서는 강연이 시작 되기전 특별한 무대가 조성됐다. 서울 브랜드 추진위원회 활동 위원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와 박재동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의 특별공연과 대담이 있었다.

김 교수의 통기타 연주에 맞춰 박 교수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선택한 노래는 현인의 <서울야곡>(1950, 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이었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좌)와 만화가, 박재동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좌)와 만화가, 박재동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

1.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2.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3.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박 교수는 선곡 이유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나왔던 노래다. 그 시대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던 노래라 불렀다”며 설명했다. 노래가 끝난 후 부산출신 박 교수와 일본 오사카 태생인 김 교수는 서울이란 도시에 와서 느낀 문화적 충격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문화, 명동거리, 민중미술 시대의 추억의 인사동, 헌책방 거리 등에 대해 이야기는 다채로웠다.

노래에서 나오듯 서울의 최고 번화가는 충무로와 명동이었다. 이후 6.25 전쟁이 터져서 서울 한복판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예술인, 지식인들은 그 속에서도 예전의 화려함과 예술적 낭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50년 전 별들의 고향이라 불리던 그때 충무로 거리는 영화로 복작거렸다. 충무로 영화전성시대라 불리는 60년대엔 배우, 배우지망생, 감독, 작가 등 영화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꿈과 낭만을 안고 충무로 거리를 춘하추동으로 누볐다. 충무로에 자리한 수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등은 자연스레 영화인과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의 발길을 명동에서 충무로로 옮기게 했다. 화제작이 개봉되는 날이면 충무로 극장가엔 새벽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영화는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충무로는 6.25전쟁 휴전 이후, 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흥행에 성공하면서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후 통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포크송의 시대가 열렸다, 1960~70년대는 서울이 온통 젊은이들로 가득했었다. 청년문화의 시대가 된 것이다. 종로 YMCA 중심으로 전국에 기타 배우기 붐이 일었따. 명동에 밀려서 그 위용을 잃어버렸던 북촌, 종로가, 탈식민의 시대, 광복과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의해 다시 서울 문화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혜화동, 명륜동, 동숭동 일대가 1990년대부터 대학로라 불렸다.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 많은 대학이 밀집해 있었고 마로니에 공원 등이 서울대 캠퍼스였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위대열이 혜화동로터리에서 만나 종로통을 지나 세종로 국회의사당에 집결하거나 경복궁 뒤 청와대를 향하기도 했다.

동숭동과 혜화동에는 당시 청년 문화를 이끌던 문학과 사회학과 연극의 메카로 자리했고 젊음의 뜨거움과 미래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낯선 분노 등을 삭혀줄 선술집도 많았다. 명동과 무교동이 가수들에게 일종의 대중적인 ‘전국구’였다면, 신촌은 자유로운 대학가 해방구이자 언더그라운드의 메카였다.

신촌에는 70년대부터 라이브 연주를 하는 음악 감상실이 생겼고, 그 흐름이 80년대로 이어졌다. ‘신촌블루스’는 ‘신촌’이라는 동네의 자유로운 느낌과 ‘블루스’가 음악 장르로서 갖는 즉흥적이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움, 히피 문화를 묶어 그 이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1960년대 명동, 1960~70년대 세종로, 1980년대 신촌처럼 문화예술인들의 활동무대는 유동인구를 부르고, 지구는 상업화됐다 이후 치솟은 땅값을 감당하지 못해 사라졌다.

이때부터 신촌의 “언더”는 홍대의 “인디”로 바뀌게 된다. 홍대는 덜 상업화된 공간, 문화적 저항의 기운이 감도는 곳, 예술적 풍취가 있는 대학가로 젊은이들의 마음 속 지도에 그렇게 자리잡아갔다.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인디문화의 중심지 홍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은 어느 서울 골목을 가도 ‘최루탄 냄새’가 났다. 시청 앞에 100만이 모였다. 박 교수는 서울에서 문화를 느꼈던 때를 시위현장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넥타이부대, 높은 건물에서 휴지를 내렸던 6월 항쟁과 인사동의 전경들과 함께 했던 ‘민중 미술’,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게 느꼈던, ‘촛불 시위’가 떠오른다. 그때 우리들의 시위문화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쓰레기 치우고 바이올린 켜고 기타 치며 토론하는 그 모습이 좋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우리 어머니가 사시는 곳이 목동의 옛 동네다. 어머니가 언덕길이 있는 동네에서 고생시는 것이 안쓰러워 이사를 해드리려 했더니 어머니가 거부하시더라. 그곳에 어머니와 함께 삶을 꾸리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에 있는 시장에서 이런저런 얘기하시는 일상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라며 “동네마다 그 지역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는 시장과 같은 지역에서 새로운 문화의 현장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를 새기며 조성된 서울의 지역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연사는 백선혜 박사였다.

강연 중인 백선혜 박사

강연 중인 백선혜 박사

백선혜 박사는 서울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소, 일본 가나자와대학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문화예술교육 정책, 축제와 장소마케팅, 문화예술동아리, 시민예술행태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소성과 장소마케팅>, <예술을 통한 지역만들기>, <서울 도시디자인전략 연구>, <서울시 축제의 질적 관리방안> 등이 있다.

문화, 상이한 사람들의 ‘연결 고리’

백선혜 박사는 문화도시를 설명하기 전에 ‘문화’에 대해 정의 내렸다. 문화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모든 활동이다. 일반적으로 ‘인문학, 예술, 정신적 산물’을 하는 활동으로 인식되지만 이것과 연결된 가치관과 중요시 생각하는 분위기도 문화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서울시에서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내걸고 있는데, 문화야 말로 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다. 즉 도시사회적인 측면에서 문화가 최근에 중요하게 된 것.

백 박사는 “예전에는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면서 다 이웃사촌이라는 해석이 강했는데 지금은 다문화가 됐다. 국제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며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노력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됐다. 문화예술을 통해 다문화 속에서 상이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이해와 소통은 민주주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문화도시 모범 사례 : 뉴욕의 ‘하이라인’, 일본의 ‘나오시마 섬’

백 박사에 의하면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선 시민들이 누구나 일상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이나 프로그램과 같은 소프트웨어 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백 박사는 그 사례로 먼저 ‘뉴욕의 하이라인과 로우라인’을 언급했다. 뉴욕은 미국 문화의 중심지로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 심이자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

그 이면엔 뉴욕의 ‘하이라인’이 있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파크(High Line Park)는 대표적인 해외 도시재생 사례로 꼽힌다. 맨해튼의 로어 웨스트 사이드(Lower West Side)에서 운행됐던 2.33㎞ 길이의 고가 화물노선(도심철도)에 꽃과 나무를 심고 벤치를 설치했다.

프랑스 프롬나드 플랑떼(Promenade Plantee, 1993)를 모델로 해 역사성과 특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철로의 3분의 1을 남겨 산책로를 만들었다. 지역별로 정원을 비롯해 각종 의자와 수변공간이 배치됐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에 걸쳐 3단계로 진행됐다.

2003년과 비교했을 때 2013년에 가치는 103% 증가(도보 5분 이내)했다. 새로운 일자리는 1만2000여 개가 창출됐다. 공원이 생기면서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 장 누벨(Jean Nouvel), 시게루 반(Ban Shigeru) 등 유명 건축가들의 빌딩과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한 휘트니 미술관이 들어서는 등 주변 부동산 개발 및 상권이 활발해지고 각종 문화시설 유입도 이뤄졌다. 하이라인의 성공으로 2018년엔 폐 터미널을 지하공원화 하는 ‘로우라인’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백 박사가 다음 사례로 든 건 일본의 ‘나오시마 섬’ 이었다.

나오시마 섬의 상징인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호박

나오시마 섬의 상징인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호박

일본 시코쿠 가가와현의 나오시마는 산업폐기물이 가득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한 버려진 섬이었지만 현재 자본과 건축예술, 주민의 힘이 더해져 세계적인 예술섬으로 변신했다.

당초 나오시마는 중공업의 중심지였지만 산업폐기물과 오염 등으로 생활여건이 악화되면서 주민들이 떠나던 유령섬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베네세그룹이 1985년부터 한화 6,500억여 원을 투자했고, 유명건축가인 안도다다오의 창조·예술능력이 더해지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했다.

나오시마섬과 주변 섬들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건축물과 미술관을 건립했고, 역사유적과 폐가·공가, 심지어 100여 년 전 폐쇄된 공장까지 창조공간으로 승화시키면서 세계적인 예술섬이 됐다. 인구 3,600여 명인 작은 섬 나오시마는 현재는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아름다운 예술섬으로 재탄생했다.

백 박사는 위의 사례를 통해 “문화도시가 되는 것은 멋진 문화적 시설들을 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문화 도시를 이루는) 시설이나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지역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한다. 즉, 껍데기만 베껴가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가져가야 한다”라고 해외사례의 올바른 활용 방식을 역설했다.

서울의 대표적 문화공간 : 서울, 홍대 그리고 문래동

그렇다면 서울의 대표적 문화공간은 어떨까. 서울은 홍대, 대학로와 같은 문화예술 밀집지역이 있다.

먼저 ‘대학로’는 1979년 서울대학교 이전 완료 후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하며 신촌 지역에 있던 예술가들이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비교적 집값이 싼 대학로로 옮겨오며 문화예술 밀집지역으로 성장했다.

대학로 공연장 밀집 지도

대학로 공연장 밀집 지도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로에 있는 공연장 수는 57개에서 164개로 증가하며 에 공연장들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이에 백 박사는 “이곳을 투자 개발 지역이라 오해한 일부 사람들이 부동산 투자를 하며 대학로 마저 임대료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극장들의 월 임대료가 1,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임대료를 내려면 치소 300석이 되어야 하는데 대학로에 위치한 공연장의 70% 이상이 200석 미만이다. 300석 미만의 극장은 거의 90%라 수지를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문화밀집 지역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나 일부 인센티브로는 문화 예술 도시를 유지할 수 없다. 지역 주민들이 서로 합의하고 시민들이 지켜야겠다는 의식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예술 공간으로 인디문화, 클럽문화의 성지인 ‘홍대’도 빼놓을 수 없다. 홍대가 인디문화의 거점이 된 건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백 박사는 “홍대는 원래 젊고 배고픈 예술가들의 공간이자 아틀리에였다. 흔히 ‘108 작업실’로 불렀는데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8만 원이라는 뜻이다. 홍대에는 저항으로 상징되는 인디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한때 홍대클럽은 압구정 오렌지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압구정은 춤만 춘다면 홍대는 예술이 있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있던 동네였다”라고 문화 예술 공간으로서의 홍대를 설명했다.

홍대 앞 문화예술 공간 [김수아, 2013, 서울시 문화공간의 담론적 구성 홍대 공간을 중심으로, 서울연구원, p.28] 자료제공=백선혜 박사

홍대 앞 문화예술 공간 [김수아, 2013, 서울시 문화공간의 담론적 구성 홍대 공간을 중심으로, 서울연구원, p.28]

그러나 홍대는 자본 중심의 상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도시 재개발을 거치며 환경이 좋아지고 사람들이 예술가들이 만들어 놓은 특유의 동네 분위기를 느끼며 그들의 퍼포먼스를 구경 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다 보니 상권이 성장하고 임대료가 상승해 예술가들은 하나 둘 떠났다. 홍대의 예술가들은 다시 ‘문래동’으로 이전했다.

문래예술공간

문래예술공간

문래동은 본래 1960년대부터 중소 철공소 밀집지역으로 유명했다. 2000년대 초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철공소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한 이곳은 2003년부터 대학로와 홍익대 인근에서 활동하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비어있는 철공소 공간에 작업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10년 남짓이 흐른 지금, 이곳은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촌으로 꼽힌다.

홍대를 떠나 새 작업공간을 찾는 예술인들의 발길은 문래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래동처럼 대규모는 아니지만 서울 곳곳에 예술인들이 모여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곳이 늘고 있다. 이들 간의 네트워크도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이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예술’, ‘사람’, ‘도시’를 잇는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서울시 창작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서울시 창작공간은 도심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이 되어 서울시내의 낡고 버려진 공간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 하여 다양한 장르의 예술창작 지원 및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추구하고 있다.

서울시 창작공간

서울시 창작공간

이밖에 인쇄공장이었던 ‘금천 예술공장’은 국제 레지던시 스튜디오이자 프로젝트 스튜디오로 바뀌었고 재래시장 지하상가였던 ‘산당 창작아케이드’는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 임대가 가능한 창작 공예 공방으로 탈바꿈했다. 도심 속 전원형 문학 창작촌이 된 ‘연희 문학창작촌’과 무용, 시각예술 지원 및 장애인 문화예술 향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잠실창작스튜디오’등 여러 서울 지역에 서울문화재단이 지원·운영하는 예술공장 및 예술창작센터가 있다.

문화예술 도시 가꾸기 ‘도시 존립에 필수적’

서울은 지난 10여 년 간 문화시설이 꾸준히 증가하여 시민이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여건 조성됐다. 공연시설의 경우 2005년 147개소에서 2012년 285개소로 약 200% 증가했으며, 서울서베이에 따르면, 서울시민의 문화환경 만족도는 2006년 19.8%에서 2012년 48.7%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서울시민은 여가활동으로 TV(비디오) 시청(77.9%)과 휴식(47.1%)을 선호하는 반면, 21.4%의 시민만이 문화예술 관람을 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문화인프라가 크게 확충되고 인간 중심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나, 아직 시민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제7회 서울이야기 강연 현장

제7회 서울이야기 강연 현장

이에 백 박사는 “서울시에서 문화가 중요하다 인식하게 된 건 얼마 안 된다. 예전에는 배고팠던 시절이라 문화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계획은 2000년이 지나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백 박사에 의하면 2006년 세워진 <비전 2015, 문화도시 서울>은 서울시에서 최초로 수립한 문화기본 계획이다. 문화시설을 짓는 걸 우선으로 생각하며 기본적인 문화 예술의 인프라를 형성했다. 2008년에는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을 추가하며 문화와 경제를 연계한 컬처노믹스(Culturenomics)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계획을 세웠다. 문화로 행하는 산업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그 결과 문화시설들이 많이 증가했지만 영화외의 순수예술에 대한 관람률에는 큰 변화가 없다.

백 박사는 “시설을 늘렸는데도 시설만 짓는다고 문화향유율이 올라가는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일상생활이 문화가 되는 계획을 세워야 겠다 해서 시민 개개인이 행복해져야겠다는 목표로 수립되는 게 지금 새로운 문화계획정책 <비전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서울이 ‘문화예술 도시’가 되기 위해 앞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에 백 박사는 ‘도시의 문화적 재생’,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춘 도시’, ‘예술하기 좋은 도시’ 등을 꼽았다.

그는 “도시 노후화가 지속되고 있어 양적 공급 위주의 도시 확장은 한계에 봉착했다.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간직한 도시 재생이 관건이 된 것. 서울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문화의 근본적 속성으로 서로 다름에 대한 포용과 공감을 시도해야 한다. 고령화, 1인 가구화, 다문화 등의 서울의 미래상을 고려할 때 문화는 도시 존립에 필수적”이라며 “문화는 미래의 먹거리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창조산업이 문화예술이 근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공간, 문화예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

백 박사의 강연이 끝난 후 시민들과 함께하는 ‘집중 토크’ 시간이 이어졌다. 이 시간에는 시민들이 전문가와 어우러져 함께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진행자 이제이 교수의 질문으로 시민들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은 시작됐다. ‘어떤 공간을 서울의 문화공간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민들은 ‘홍대, 문래예술창작공간, 4대궁궐, 마로니에 공원, 정동극장, 대학로, 선유도 공원, 신사동 가로수길’ 등을 말했다.

의견을 말하고 있는 배우 이광기씨

의견을 말하고 있는 배우 이광기씨

이날 배우 이광기씨도 서울이야기 콘서트에 참석했다. 배우 이광기씨는 “어떤 사물을 보고 나서 영화관에 갔을 때 정말 감동스러운 영화인데 울지 않는 사람들은 문화인이 아닌 것 같다(웃음). 문화예술을 보고나서 울림과 감동 그리고 즐거움을 느낀다면 모두 문화인이 될 수 있다”라며 문화공간을 향유하는 문화인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이어서 시민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시민은 점점 상업화 되고 있는 문화예술 밀집 지역에 대한 해법을 물었다.

이에 백 교수는 “앞서 설명했던 홍대나 대학로와 같이 낙후된 지역에 예술가들이 모여 그곳을 살려놓으면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이르는 용어)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화 자체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정책은 없다. 문래예술공간처럼 지자체에서 민간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거나 정책으로 보호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지원이 끊어지면 그 다음에 문화가 없어진다. 앞으로 서울시의 문화정책에 시민들의 자발적 자원 이 중요한 이유다”라고 답변했다.

한 시민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화바우처’(저소득층이 공연 및 전시회 입장권 및 책 등을 구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정부가 비용의 50%를 부담하는 제도)의 실효성에 대해 물었다.

이에 백 박사는 “문화바우처로 1년에 5만 원 더 준다고 문화예술 즐기라고 하는 게 사실상 힘든 부분일 수도 있다. 그들은 시간이 없고 일해야 하니까. 장기적으로는 소외계층 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화적 권리에 대한 차원으로 정책을 품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초등학생은 누구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시설에서 공연을 한 번씩은 볼 수 있게 하는 등 특정계층을 위한 것이기 보다 문화적 권리로 찾아 갈 수 있는 보편적 문화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답했다.

또 다른 시민은 ‘다문화 도시의 문화예술 활용방안’에 대해 물었다. 백 박사는 “다문화 문제는 아직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향후 10년 이내에 굉장히 심각하게 다뤄질 문제다.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섞이며 같이 가야 한다. 지금은 ‘글로벌 빌리지 센터’같은 커뮤니티들이 조성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선 ‘소통’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소통은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한 ‘공감’에서 이뤄진다. 이들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답했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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