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② 서울 역사와 도시계획

내 손안에 서울

발행일 2015.04.29. 13:55

수정일 2015.05.0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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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울, 서울 브랜드 이야기] 서울시가 도시브랜드 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시민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를 지난 2월 27일부터 오는 5월까지 개최합니다. 서울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시민들과 분야별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서울의 핵심 정체성을 도출한다는 취지로 서울의 산 과 강, 수도, 만남, 시장, 노래, 맛, 문화, 거리, 서울 속의 세계 등 10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이 토크 콘서트에 이코노믹 리뷰 기자가 직접 참석해 우리가 몰랐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서울 브랜드'의 이야기를 지상중계 합니다.

[우리의 서울이야기 제2화] 서울, 수도를 말하다 : 서울 역사와 도시계획

제2회 우리의 서울이야기 콘서트 진행 현장 ⓒ이코노믹리뷰

제2회 우리의 서울이야기 콘서트 진행 현장

지난 3월 6일 저녁, 서울시민청 8층 다목적 홀에는 <시민 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에 참여하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다목적홀의 둥근 원탁에 하나둘 사람들이 앉더니 이내 모든 자리가 약 120여명의 시민들로 꽉 채워졌다. 이 콘서트에는 서울도시브랜드추진위원회 위원 및 관계자들과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한 서울 시민들, '서울얼굴가꿈단' 단원들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한편, 서울얼굴가꿈단은 서울의 브랜드를 만드는 전 과정에 참여해 시민의 목소리를 시에 전달하는 단체로 고등학교 1학년생부터 72세 어른까지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245명의 시민 단원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민콘서트는 부드러운 클래식 연주로 시작됐다. 그룹 '앙상블 Bb'는 차분하고 편안한 현악기 연주를 통해 콘서트의 서문을 열었다. 연주를 듣는 시민들 중 일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연주에 귀 기울이며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룹 `앙상블 Bb`의 오프닝 무대 ⓒ이코노믹리

그룹 `앙상블 Bb`의 오프닝 무대

시민 콘서트는 매회 콘서트의 분위기를 돋우는 음악 공연으로 시작한다. 서울시 시민청에 속해 있는 '시민청 예술단' 단원들이 기량을 선보이는 것. 실제 시민 청에서는 연 1~2회 정도 아마추어 예술가들을 선발해 시민청 예술단을 꾸린다. 예술단원들은 시민청에서 연결해주는 무대인 '시민청 활짝 라운지' 등에서 평일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무료공연을 한다.

서울시 도시브랜드 담당관 관리팀 박순희 주임은 "시민 콘서트에서 공연을 선보이는 팀들은 시민청 예술단에서 약 30팀의 추천을 받아, 시민콘서트 주최측에서 선발한 팀으로 소정의 출연료를 지급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시민과의 소통을 내세운 콘서트답게, 공연팀도 서울시민들의 참여로 이뤄지고 있었다.

지난 3월 6일 서울시 시민청에서 열린 제2회 서울이야기 토크 콘서트의 모습 ⓒ이코노믹리

지난 3월 6일 서울시 시민청에서 열린 제2회 서울이야기 토크 콘서트의 모습

제2회 서울 이야기는 서울의 풍경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도시개발의 관점에서 진행됐다.

"지난 시간에는 서울의 산과 강이라는 지리적 조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수도로서 서울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근대 도시 이후 서울의 풍경들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진행자 김민웅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정책대학원)와 이제이 교수(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의 능숙한 진행으로 서울 이야기의 본 강연이 시작됐다.

이번 콘서트에는 국내 대표 도시학자인 통의도시연구소 최종현 소장이 연사로 나섰다. 최종현 소장은 평생을 도시에 대해 연구한 국내 대표 도시학자로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뒤 사단법인 통의도시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전통건축에서의 정면성', '한국 도시의 입지와 구조', '옛길에서 만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을 연구했으며 저서로는 <옛사람의 발길을 따라가는 우리 건축 답사1, 2>, <남경에서 서울까지>, <오래된 서울>(공저)이 있다.

오늘날 서울의 이름은 크게 조선·한성·경성·서울 4가지로 나뉜다. 이에 최종현 소장은 "각 이름마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한강의 남쪽, 한강의 북쪽에 입지한 곳이 '한양'인데 이곳에 성곽을 쌓은 곳이 '한성(漢城)'이 되는 것이다"라며 "특히 경성이라는 말은 (1910년도 일제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됐다) 시대적 의미에서 지양해야 할 것"이라며 덧붙여 설명했다.

서울은 명칭의 의미를 넘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역사도시'로 불린다.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600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이고 고려시대 남경까지 생각한다면 900년이 넘는다.

하지만 최종현 소장은 오늘날 우리가 서울에서 '역사'를 느끼기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최종현 소장은 "정도전이 야심차게 계획한 뒤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한양은 서울에 이르러 이름뿐인 '역사도시' 서울이 되었다"며 아쉬움을 내비췄다.

인류문명의 변화에 따라 삶의 방식이 변하고 사고방식과 그것을 구현하는 공간이 변해가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더군다나 서울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꿨다.

최종현 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방식은 그동안 빠르게 바뀌어 온 서울의 도시적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며 "서울이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할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어떻게 형성됐고 변화해 왔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라며 서울의 도시 개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성(漢城)부터 대한제국 까지 '서울의 도시개발'

1915년 제작된 [한성부 역사도시의 산수 체계도]. 1/10,000 육지측량 ⓒ통의도시연구소

1915년 제작된 [한성부 역사도시의 산수 체계도]. 1/10,000 육지측량

(고려시대 남경의 한양부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생략됐다) 조선시대 서울, 즉 한성(漢城)은 동으로 백두대간을 면하고 남으로 한강을 면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해서정맥(海西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에 대응하고 있다. 한강과 산들이 교차하는 결절 점에 위치해 방어에 유리하면서 강을 따라 이어지는 조운(漕運) 교통망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도성(都城)은 4대문과 4소문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축이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이다. 이 가로축에 붙어 정(丁)자로 교차하면서 남으로는 남대문과 이어진다. 북으로는 정궁인 경복궁, 동궁인 창덕궁, 종묘 등과 이어지는 가로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성의 가장 기본적인 도시 구조다.

도시경관이 바뀐 것은 대한제국을 전후로 근·현대 건축이 도성 안팎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다. 대중교통인 전차노선이 가설되면서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원구단과 황궁우 등이 들어섰고, 서쪽에는 외국의 공사관 및 관아, 영빈관 등 건축물이 들어섰다.

남대문 밖과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에는 기차역인 남대문역과 서대문역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조선 총독부, 서울 신궁 등 식민지 통치의 핵심 구역이 형성됐다. 최종현 소장은 이때를 "남대문로와 소공로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금융·정보·통신·소비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현대적 장소성'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후 현대 양식으로 복구된 서울 그리고 '강남 개발'

 1950년 6·25전쟁 중 불타 버린 서울 종각과 내려앉은 종 ⓒ통의도시연구소

1950년 6·25전쟁 중 불타 버린 서울 종각과 내려앉은 종

6·25전쟁 이후 서울은 그야말로 폐허가 됐었다. 최종현 소장은 "아쉽게도 '어떻게 복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수렴 과정과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들이 결여된 채 '복구가 최우선'이라는 일념으로 급하고 근시안적으로 진행됐다"라며 전쟁 후 서울 복구 과정을 설명했다.

최종현 소장에 의하면 당시 과거는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택하는 것이 올바른 귀결이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더욱이 그 복구가 우방인 미국의 원조와 차관으로 진행돼 미국이 제안한 복구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 결과 역사도시라 불리던 서울의 파괴된 옛 건물은 방치해두고 새로운 용도의 건축물들이 현대 양식으로 도시 중심부에 두서없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경제개발은 곧 산업화라는 일념으로 '하면 된다'라는 슬로건 아래 여러 개발이 본격화 됐다.

당시 군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제2공화국에서 기획되었던 경제개발이라는 목표를 밀고 나갔다. 그에 상응하여 이루어진 도시화는 도시계획 및 도시설계에 대한 개념과 논의를 압도했다.

역사도시였던 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대규모 공공시설과 사무소 건축들이 출현했다. 또한 사대문 안은 현대 도시로서 적합하지 않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과 달동네를 정비한다는 명분 아래 대기업에게 개발권이 부여됐다.

1976년 서울 한강변의 아파트 단지 모습 ⓒ정부기록사진집

1976년 서울 한강변의 아파트 단지 모습

이어 서울의 사대문 밖에서 진행되던 도시의 확장에 장애가 생기자 이때 '강남'이라는 대안이 나타났고 한강변의 주인 없는 땅 또한 중요한 개발의 표적이 됐다.

이때도 '과거의 옛 모습'을 되돌아보려는 일부 시민들의 의식도 있었지만 근대화·산업화로 진행하는 길목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로 치부됐다. 최종현 소장은 당시의 급진적 산업화에 대해 "문화재 전문가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조차 역사물은 '폐기 처분할 불필요한 쓰레기'로 취급받을 뿐 이었다"고 설명했다.

최종현 소장에 의하면 높이 솟은 콘크리트 숲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산재해있던 역사유적이나 건축물, 사적지는 그 역사적 연계성과 장소성을 상실하고 고립됐다.

부동산 투기라는 재산 증식의 방법이 개발을 주도하는 자들에 의해서 고안되면서 문제는 시작됐다. 기존 도시를 유지하고 관리하며 회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새로운 땅을 개발하려는 발상들이 현대화 정책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

최종현 소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포크레인이 도입되며 엄청나게 지형이 손상되기 시작했다"며 "도시화라는 것은 속도라고 생각하지만 문명과 속도는 비례한다. 속도에만 집중하다 보면 인간이 염두해야 하는 많은 것을 잊게 하고 훼손시키기 마련이다"라며 속도에 치중한 도시 개발 형태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세계적으로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던 80년대 에도 서울은 강남 개발이 한창 무르익던 시기였고 강북의 사대문 안팎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버려진 상태였다. 다세대주택은 사대문안 전통한옥지역을, 초고층아파트는 성 밖을 가득 메웠다. 최종현 소장은 이를 "전염병인 흑사병이 지나가듯 증축됐다"고 표현했다. 더불어 역사도시의 나머지 공간들에는 대규모 업무시설들과 소규모 상업시설들이 들어섰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는 욕심 보다, '나이테가 새겨진 도시' 되야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 소장 ⓒ이코노믹리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 소장

이어 최종현 소장은 "민선 시장 1,2기는 이전 정부들이 초래한 갖가지 부작용을 철거·해체·치유·수습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수행해왔지만, 현재 도시정책의 대부분은 아쉽다"며 "청계천 복원, 경제 허브, 르네상스, 디자인 시티 등 역사도시와는 상충되거나 무관한 것이 대부분인데, 서울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기획들의 의미가 못내 염려스럽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렇다면 서울은 역사문화의 도시, 경제중심 도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최종현 소장은 "두 마리 토끼는 함께 잡지 못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서울은 경제허브인가 역사도시인가, 서울다움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냉정하고 치밀하게 따져보고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최종현 소장은 서울이 지속가능한 역사도시가 되려면 "유럽의 도시와 같이 역사가 묻어나야 한다. 성장했다는 과거의 나이테가 현재와 함께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며 "보존 및 유지와 관리는 자연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인간의 삶의 영역과 조화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형과 수계가 지나치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도시 입면·건축물 유형·가로 및 광장·도시 평면·도시 밀도 등이 합리적으로 조성되었을 때 그 도시의 특성에 맞는 최고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최종현 소장은 서울이 역사도시로서 지속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지형과 수계를 자연상태로 보존 ▲간선가로 및 골목길 보존 ▲소규모 필지로 개발 ▲대규모 개발지는 도시민을 위한 공공시설로 환원 ▲주거지 비율을 최대한 늘림 ▲사대문 안팎의 고도제한을 전체 단위로 지정 ▲문화재·유적·기념물 등은 주변을 포괄하는 도시설계로 대치 ▲ 장기·중기·단기 국토문화재 보존계획 마련 ▲국민과 시민들에게 항상 공개되고 교육하는 열린 규제관리계획 수립 등으로 제시했다.

고려시대 남경역의 모습을 그린 상상화 [남경역](민정기, 2013, 35*24cm, 종이 위에 과슈) ⓒ통의도시연구소

고려시대 남경역의 모습을 그린 상상화 [남경역](민정기, 2013, 35*24cm, 종이 위에 과슈)

서울은 지형과 수계, 즉 산수체계 역시 우리나라의 도시 입지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에 면하고 있어 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 중에서 실개천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과거 한성은 내사산 자락의 경사와 실개천으로 구획되어 형성된 단위공간으로 도시구조가 형성됐다. 실제로 경복궁, 창덕궁, 종묘, 성균관 등의 입지가 모두 좌우의 실개천에 의해서 경계 지어졌다.

산과 물은 기후 변화에 따라 시시때때로 적절하게 반응하기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경색(景色)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훌륭한 환경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지형과 수계를 철저히 분석해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최종현 소장은 "실개천과 더불어 간선가로망은 물론 옛 골목길도 지정해서 보존하고 기존의 대규모 필지는 분할해 작게 나누어야 한다"며 "작은 규모의 개발이 역사도시의 조직을 보존하고 건축물 높이도 규제할 수 있어 주거지 비율을 높이는 방법으로도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최종현 소장은 대규모로 개발되었던 곳의 필지 분할이 불가능하다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공시설로 개발하여 조성하는 방법을 제안 했다. 중앙정부나 시정부의 미술관, 박물관, 음악당, 광장, 공원 등의 시설들이 그 예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시민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 관심과 애착을 가지게 하고 도시를 가꾸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시민들이 생각하는 서울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점'

최종현 소장의 강연이 끝난 후 이제이 교수의 진행과 함께 시민들이 생각하는 '서울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수도 서울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민 발제자들 ⓒ이코노믹리

수도 서울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민 발제자들

첫 발제자 김경민씨는 수도 서울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는 '한성 백제'라는 말로 발표를 시작했다. 김경민씨는 "서울은 해상왕국 이었던 백제의 중심이었다"며 "몽촌토성, 풍납토성, 서촌동 백제 고궁분 나들이를 하면서 서울의 놀러가기 좋은 공원정도만 생각했는데 그곳에 서울의 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고 서울의 기나긴 역사에 대해 감탄했다.

이어 서울에서 50년 동안 거주했다는 박혜자씨는 서울의 중요한 역사적 시기로 '88서울 올림픽'을 꼽았다.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시험을 치루고 나면 개인의 기량이 크게 향상되듯, 88올림픽 이라는 큰 대회를 치루고 서울의 위상이 세계에 알려진 것 같다"며 그 당시를 서울 살이 50년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마지막 발제자는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서울시민 이봉근씨였다. 그는 서울의 중요한 역사적 시점을 '1960년대~1980년대 초의 고도성장기'라고 말했다. "당시(1960년대~1980년대) 서울인구는 600만 명이 늘었다. 폭팔적으로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느라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지난 30년간의 시간이 그전 600여년 시간 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친게 아닌가 싶다"며 "어렸을 적 가던 슈퍼는 생소해지고 슈퍼마켓이 익숙해질 때 고도 성장이면에 감춰진 불평등과 불균형 그리고 뒤틀린 욕망이 강남의 발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의 성장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밖에도 콘서트에 참석한 서울시민들은 서울을 변화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한강의 기적', '87년도 6월 민주화 항쟁', '버스환승', '2002년 월드컵' 등을 꼽았다.

진행자 김민웅 교수(왼쪽)와 최종훈 통의도시연구소 소장ⓒ이코노믹리

진행자 김민웅 교수(왼쪽)와 최종훈 통의도시연구소 소장

이에 최종현 소장은 "서울의 현재 모습은 80년대 압축성장의 영향이 크다. 70년대 말 월남 파병, 독일에 파견근로자를 보내고, 중동 건설업에 진출하는 등의 사건으로 정부에 자금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압축성장은 시작됐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도 이때 나온 말이다"라며 설명을 덧 붙였다.

한 시민 참가자는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성장한다'는 말에 대한 최종현 소장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에 최종현 소장은 "현재 서울은 '한강의 분단'이다. 지금은 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을 나눠 남쪽과 북쪽에 서로 다른 이질적인 도시가 있다. 이로 인해 한강변 지형이 너무 요란하다. 고구려시대 국내성과 평양성을 보면 강을 두고 좌우로 성장했다. 도성 안에 물길이 있던 것이 개천(청계천)인데, 한강으로 도시를 확장 시킨 것은 안타깝다"라고 답변했다.

콘서트가 무르익고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진행자 김민웅 교수는 최종현 소장에게 최소장이 생각하는 올바른 도시에 대해 물었다.

최종현 소장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 그것이 진정한 도시다" 라며 "4대문에서 어디든지 접근 할 수 있고 차를 의식하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심이라면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곳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최종현 소장은 "유가들이 자주 쓰던 글귀 중 '진리도 변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도시에 적용하여 생각하곤 한다"며 "도시는 완결품이 아니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당대의 시민들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된다. 도시를 창조하고 관리하며 가꾸는 관리들은 시민의 의견을 근간으로 머리를 맞대 지속적으로 도시를 계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www.econov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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