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발행일 2015.02.25. 14:28
[그날의 함성을 기억합니다](1) 조선 최고 명문가문이 조선 독립 운동의 불씨로, 우당 이회영 선생
통인시장, 수성동 계곡 등 요즘 뜨고 있는 핫한 동네, 종로구 서촌(조선시대 때 생겨난 이름으로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 서촌 지역 가운데 하나인 종로구 신교동엔 '우당 기념관'이라는 자그마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의 주인공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 운동가이다.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에는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다. 제 발로 들어오는 시민은 드물고, 주로 학생들이 학습을 위해 단체 관람하러 온단다. 나 또한 자전거를 타고 서촌 동네를 돌아보다 우연히 알게 된 곳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빼놓고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던 분임을 알게 해준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그의 작은 기념관에 들어서면, 검은 누비옷에 모자를 쓰고 형형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 속에 우당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 후손을 맞이해 준다. 그의 평전에 나와 있다는 인용문 또한 눈길을 끈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勢德)이 이 시대의 으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 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이제 우리 형제는 당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고 처자노유(妻子老幼)를 인솔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차라리 중국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 한다. 또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근역(槿域)에서 하던 모든 활동을 만주로 옮겨 실천하려 한다. 만일 뒷날에 행운이 있어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白沙公,이항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 주기를 바라노라. |
우당의 나이 44세 때, 조선이 일본의 강압으로 나라의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가 벌어지자 "우리 형제가 명문자손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생명을 구한다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라며, 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등 5형제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자고 설득한다. 정승 열 명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일컬음)에 만석꾼 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회영의 형제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자는 넷째인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 우당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자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이유원이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이다.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장관)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1910년 겨울 12월 하순 6형제 일가족 60여 명은 지금으로 따지면 명동 일대 수백억 원의 전 재산을 처분하고,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탄 채 칼바람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다. 동참하는 종들은 함께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방 시켰다. 그야말로 최초의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집단적 실천이었다. 당시의 집권층이 기득권을 지키고 나라 판 대가로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한 것과 너무도 대비되는 행보였다.
우당 일가가 정착한 곳은 서간도 지역인 중국 길림성의 삼포원이라는 작은 마을. 그곳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열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다. 신흥강습소는 수많은 무장독립투쟁가들을 배출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는 1930년 폐교될 때까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2천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들은 특히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등 여러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학비는 무료였고 수많은 전투자금도 이회영 일가의 돈으로 충당했다. 후일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가서는 '의열단' 등을 세우는 등 수많은 열사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우당의 가문은 형제와 자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6형제 중 5형제와 많은 조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타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우당 또한 1932년 만주주재 일본군사령관 처단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다롄으로 향하던 도중, 일본 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32년 선생의 나이 66세였다. 이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최근에야 부인 이은숙씨의 회고록과 일부 학자들의 평전, TV 방송을 통해 선생의 삶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후에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지난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해방을 맞은 다섯째 이시영만이 돌아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그야말로 온 집안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부족할 듯하다.
대다수의 권문세가와 양반들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지키고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데 이들은 왜 편안한 기득권을 버리고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살인적인 추위의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벌였을까? 항일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 가문에 큰 빚을 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6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것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아담한 우당 기념관 안엔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는 물론 격동기 구한말의 독립운동 관련 사진들과 문서,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찍은 사진 등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아 생생한 역사 공부가 되었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난과 역경 속으로 분연히 뛰어든 훌륭한 선조들에 대해 부끄러움과 함께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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