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시민기자 황정운

발행일 2015.02.10. 13:07

수정일 2015.02.10. 15:12

조회 1,025

책

[100권의 책읽기 프로젝트] (2) 인문학이 뭔데 난리야

두 번째 글은 지난 몇 년 간 거대한 책의 장벽 앞에서 느꼈던 고독의 기록입니다.

먼저 100권의 책 읽기 첫 번째 책을 읽고 난 후 들었던 생각은 '이제 다음으로 무슨 책을 읽어야 하지?'였습니다. 그런 막막함에 제 책상에 꽂혀있는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경영학과답게 대부분 경영학, 경제학 원서가 많았는데 그 중 아주 얇은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학교 2학년 봄 학기에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최동호 교수님의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1997)' 책입니다. 봄 학기가 끝나면 군 입대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학과 수업보다는 주로 문과대학 전공 수업이나 교양 수업을 들었지요.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현대시의 이해' 전공수업을 저는 타 전공이기 때문에 교양수업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최동호 교수님이 유명한 문학가이자 시인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그런 것을 알기란 전혀 쉽지 않았죠. 그냥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고 강단 있는 노교수구나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생각보다 '현대시의 이해' 수업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 하이쿠나 불교의 선시를 공부하며 이것이 현대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배우는 것인데 어떤 날은 그런 시 세계를 배우기 위해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마지막 생가인 심우장(尋牛莊)에 현장학습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책상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예전 기억들이 떠올라, 불교와 관련된 책이 뭐가 있을까 해서 몇 권의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이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2009)' 입니다. 서재에 놓인 이 책을 다시 한 번 훑어 보았지만 역시 그 당시의 내가 무엇을 배우고 이해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시의 이해'를 수강하며 느꼈던 불교 정신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기분 좋게 다시 회상했음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남은 것은 깨달음과 역사라는 불교역사철학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불교'라는 키워드의 회상,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방문했던 2005년 봄의 즐거운 기억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 뒤에 한용운 선생에 대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깨달음과 역사'는 그 사이의 징검다리였던 셈이지요. 온라인 서점에서 한용운 선생의 전기를 찾아보니 H출판사의 '한용운 평전(2004)' 책이 나왔습니다. 작가를 살펴보니 그 유명한 고은 시인입니다! 일제 총독부가 꼴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낸 성북동 심우장 이야기도 마지막에 나오고, 고은 특유의 활기 넘치는 문체로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나니 만해 선생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책을 읽고 나서 흥미를 느낀 키워드는 '고은 선생의 평전'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은 선생은 천재시인 이상,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의 평전을 출간한 겁니다. 그래서 그 해 2월과 3월에 '이상 평전(2003)', '이중섭 평전(2004)'를 마저 읽었습니다. 고은이 쓴 평전들을 읽고 나니 살아남은 키워드는 '고은'이 아니라 한용운, 이상, 이중섭이 활동하던 '일제시대 모던뽀이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 '이상과 모던뽀이들(2011)',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2003)', '백석평전(2011)', '나목(1970)'과 같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2005년 최동호 교수님의 수업에서의 기억이, 무슨 책을 읽을까 막막해하던 2012년 제게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그 책의 내용보다는 책을 통해 제가 재미있게 느꼈던 아주 작은 단어들이 키워드로 남습니다. 그 키워드로 다음 책을 찾아가고 그렇게 찾은 새로운 책에서는 또 새로운 키워드가 다음 책을 향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기억을 더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대학 3학년을 눈앞에 둔 2006년 가을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고 있는데 '양성평등센터'라는 학내 기관에서 특별한 세미나를 개최하니 학생들의 참여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별한 세미나가 무엇일까. 글을 계속 읽어보니 대안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보는 행사라는 겁니다. 대안 생리대라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의 세미나실에 들어서니 아뿔싸 이십 명 가까운 사람들 중에 남자가 단 두 명입니다. 그 행사에서 우리를 가르치던 사람이 '양성평등센터 성평등문화지킴이(양지)'라는 것도, 그리고 양성평등센터에서 가끔씩 이렇게 남자 입장에서는 화끈거릴 수 있지만 의미 있고 재미있는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재미있다라는 감정에서 시작했지만, 쉽게 말하여지지 않는 교내 성폭력과 여러 고민들을 접하며 단지 재미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2011)', '길을 묻는 아이들(2004)','페미니스트라는 낙인(2007)', '3 X FTM: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2008)', '빨간 기와집(2014)', '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2008)' 책들을 그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저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책들은 저에게 의미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읽혀야 할 당위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책을 통해 계속 기억하는 것은 여전히 차별과 불편함이 남아있는 사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쉽게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영역입니다. 아마 그 감정들에 기대어 여성을 다룬 책을 서너 권은 계속 읽어나가겠지요. 2006년의 경험이 하나의 키워드가 되어 제가 읽는 책들을 단단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을 겁니다.

지난 4년간 읽은 책은 저마다의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제가 모두 좋아하는, 제 관심의 영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해보면, 지난 4년간 읽은 수 백 권의 책을 분해하면 몇 십 개의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는데 그 키워드들은 개인으로서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며 그 키워드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삶이 결코 단절되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기도 합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해보면 결국 책을 읽는 이유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사라지지 않으려는 걸까요? 저는 대학생 때부터 조금씩 쌓아온 스스로의 삶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사라지지 않으려면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치관을 형성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의 화두가 무엇인지 계속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제 삶을 관통하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 키워드들이 소위 인문학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인문학은 제 키워드들이 끊임없이 질주하는 그 끝에 놓인 것이었지, 책을 읽는 시작점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이 뭔데 난리야?'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문학은 아주 좋은 길잡이입니다. 왜냐하면 제 삶이 사라지지 않게 애쓰는 기분 좋은 가치들이거든요. 그러나 내 옆에 앉은 사람도 그럴까? 이 질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고 각자의 삶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키워드들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권의 예술책이 한 권의 경영학 책보다 반드시 위대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인문학 책을 읽으라고 권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몇 년 동안 제 곁에 머문 책들이 제 삶의 어디에서부터 근거하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전의 제가 쓴 독서 후기를 읽다 보니 "이렇게 하여 나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습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20대 후반의 책 읽기도 결국은 스스로 계속 질주하고 싶은 욕망에서였을 겁니다. 인문학에 압도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저마다의 대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책 #100권 읽기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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