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의 메시지를 국민이 봤어야 했나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5.01.20. 10:33

수정일 2015.11.17. 18:45

조회 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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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80

모델 이지연과 걸그룹 글램의 멤버 다희에게 각각 1년 2개월과 1년의 실형이 선고되면서 이른바 이병헌 50억 협박 사건이 일단락됐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 여성들이고, 미수에 그쳤으며, 초범이라는 점에서 집행유예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지만 의외로 실형이 나왔다. 재판부가 이번 협박 사건의 죄질을 안 좋게 봤다는 뜻이겠다.

사랑을 배신당한 모멸감에 우발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돈을 목적으로 계획한 듯 보인다는 점,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사적인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등 이병헌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끼쳐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성들은 이병헌이 돈 지급을 거부하자 '못 뜯어낼 듯. 화가 난다. 작전 짜자', '동영상이 상당한 금전적 가치가 있다, 인터넷 매체에 넘기면 10억 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식의 메시지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헌이 이별을 통고한 것에 대해서도 '자기가 먼저 인연을 끊어줘서 땡큐다', 이런 메시지를 나눴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별의 충격으로 범행했다는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병헌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지금 개봉조차 못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가 로맨틱한 캐릭터로 드라마 주인공 역할을 맡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애초에 이런 사건이 터진 것 자체만으로도 대중의 질타를 받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여성들이 계속해서 이병헌과 이지연이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이지연의 블로그와 이병헌의 문자 메시지 등이 공개되며 이병헌에게 회복 불능 수준의 타격이 가해졌다.

이번 일로 우리 사회가 불륜에 대단히 민감한 사회라는 점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 이병헌과 이지연 사이의 관계는 전적으로 사적인 남녀관계일 뿐이었다. 그 관계에 대해 이병헌의 부인인 이민정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제 3자가 전면에 나서서 열을 올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거의 국민적인 수준의 관심과 분노가 나타났다. 정작 이병헌의 부인인 이민정이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불륜이라고 할 정도로까지 관계가 진척되지도 않았다. 이병헌이 잠시 위험한 관계로 진행시킬 뻔했다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 이별을 통보한 사건이다. 이 정도에 국민적 분노가 나타난 것을 보면 한국인은 확실히 '양다리'에 민감하다. 한때 이효리를 잇는 대형 여가수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아이비도 양다리 의혹 논란 이후 그때의 스타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유명인들은 불륜, 바람, 양다리 등이 매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걸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 번 깨달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감스러웠던 것은 타인의 남녀관계라는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가십에 뜨겁게 분노하던 사람들이, 정작 우리 공동체의 기본 윤리와 관련된 중대한 일에는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병헌과 이지연이 나눴다는 문자 메시지 대화가 공개된 일말이다. 그 메시지는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사안도, 우리 공동체의 기강과 관련된 사안도, 정치적 음모와 관련된 사안도 아니었다. 그저 남녀가 사적으로 나눈 대화일 뿐이다. 그런 사적인 영역이 마구잡이로 보도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그 메시지 대화가 마치 공직 비리의 증거라도 되는 양 대서특필했다. 언론이 이렇게 누군가의 사생활을 마구 까발리는 것은 이병헌과 이지연 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일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사적인 영역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시민적 자유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병헌에 대한 분노가 들끓는 사이에 정작 중요한 이 문제가 묻혀버렸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사생활 파헤치기를 당연히 여기는 풍토 때문에 우리 공론장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느낌이다. 요즘엔 사생활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매체까지 생겨났고, 그 매체의 기자들이 방송사로부터 보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이렇게 시민적 자유를 침범하는 사생활 폭로가 특종으로 대우받는 분위기에선 우리 언론과 민주주의의 품격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이병헌과 어떤 여성이 나눈 사적인 메시지를 무슨 권리로 전 국민에게 공개했는지, 그런 메시지 공개를 보고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는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 사건이었다.

#이병헌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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