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아야 하니깐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1.02. 17:36

수정일 2015.11.16. 06:10

조회 1,005

조명ⓒ뉴시스

램프를 만들어낸 것은 어둠이었고,
나침반을 만들어낸 것은 안개였으며,
탐험을 하게 만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56

서울로 외출할 때 이용하는 광역버스가 지나는 길가의 교회 벽면에 언젠가부터 '그래도 살아냅시다'는 입간판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그래서'도 아니고 '그러니까'도 아니다.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묘하다. '그리하여도'의 줄임말인 그것은, 살아내기 버거운 현실에 대한 힘겨운 저항의 뜻이리라. 경기도 위성도시에 살며 서울에 일터를 둔 많은 사람들이 아침 출근길에 그 문구를 볼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기분을 느낄까? 무슨 생각을 할까?

'희망'이라는 말을 쓰기가 두려운 즈음이다. 한 해가 저물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지만 좀처럼 새로운 기대와 바람을 품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외로운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황소걸음이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면 견딜 만하련만, 좀처럼 눈앞을 가리는 어둠과 안개, 팍팍한 살림살이의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그리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이 삶 그 자체의 목적이자 의미라면, 기어이 희망을 찾아야 할 밖에.

"발전과 진보를 위해서는 위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빅토르 위고는 환한 빛을 뿌리는 램프에서 캄캄한 어둠을 보았다. 방향을 알려주는 유용한 나침반에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를 보았다. 두려움을 이기고 낯선 곳을 향해 전진하는 탐험가들에게서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보았다. 실로 그러하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지 않았다면, 희뿌연 안개에 갇혀 헤매지 않았다면, 주린 배를 움켜잡고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구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간절함은 결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모자라고 충족되지 않은 결핍의 상태는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결핍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게 하고 좌절시킨다. 어둠 속에서 돌부리에 거꾸러지게 만들고 안개 속에서 난파하거나 좌초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핍은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어둠이 내리면 꼼짝달싹 못하고 집 안에 갇혀 있거나 안개가 걷힐 때까지 배를 띄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늘만 원망하며 배고픔을 견디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간절하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으로 램프를 만들어낸 사람, 나침반을 발명한 사람, 고향을 떠나 장도에 오른 사람에게 결핍은 장애가 아니었을 테다. 새로운 것을 꿈꾸게 하는 힘이며, 상상력의 원천이며, 용기의 근거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기질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뿌리 깊은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크게 절망에 빠져 허덕대지 않는다. 다분히 역설적으로, 애초에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현실을 외면하면 허황한 공상이나 망상이 된다.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나를 절망시키는 것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 나를 둘러싼 어둠과 혼돈, 배고픔의 정체와 맞서야 한다. 기어이 나만의 램프와 나침반을 발명하고, 두려움 없이 탐험에 나서야 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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