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 앞에 서서, 로댕처럼 생각하다

시민기자 황정운

발행일 2014.12.12. 12:54

수정일 2014.12.12. 13:36

조회 3,858

숭례문이 한 눈에 보이는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미술관 플라토(PLATEAU)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난 2011년 5월 삼성미술관 플라토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재개관하였는데 의외로 이곳이 예전에 '로댕갤러리'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내려가는 길 삼성생명 건물 1층 한 편에 있는데 시청역에서 찾아가기 그리 어렵지 않다.

삼성미술관 플라토, 그러니까 나에겐 로댕갤러리로 더 익숙한 이곳을 처음 찾았던 것이 2005년인가 2006년인가의 무렵이었다. 그때에도 갤러리 안쪽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전이 작게 전시되어 있었고, 입구 쪽의 홀에는 어김없이 로댕의 두 작품이 황량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로댕의 작품이 진품이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단순한 모조품이냐? 그 역시 그렇지도 않다.

로댕, '지옥의 문'

로댕, '지옥의 문'

1880년 로댕(Auguste Rodin)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새로 지을 장식미술관의 정문 조각을 제작해줄 것을 의뢰 받는다. 지금은 미술관의 정문이라는 개념이 많이 희박하지만 르네상스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형 성당, 미술관, 박물관의 입구는 이런 대형 청동문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로댕은 1884년부터 본격적으로 청동문 제작을 시작하고 1900년에 석고 버전을 최초로 대중에 공개한다.

그러나 로댕은 끝내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 작품이 이며 지금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그 석고 버전이 남아있다. 로댕 사후에 이 석고 버전으로 단 일곱 개의 청동 에디션이 만들어졌는데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파리 로댕미술관,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일본 시즈오카 현립미술관에 이어 우리나라에 로댕미술관이 그 일곱 개의 청동 에디션을 보유하고 있다. 플라토 미술관에 있는 것은 7번째로 마지막 에디션이다.

로댕, '깔레의 시민'

로댕, '깔레의 시민'

미술관 입구 쪽에 더 가까이 전시된 '깔레의 시민'도 마찬가지다. 역시 1884년 로댕은 프랑스 깔레시의 의뢰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백년전쟁 중 영국군에 포위된 도시를 구하기 위해 깔레시의 대표 여섯 명이 항복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도 과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조각을 청동 에디션으로 단 열두개만 주조할 수 있도록 프랑스 법에 명시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은 프랑스 깔레시청 앞에 전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그 12번째 에디션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파리 로댕미술관,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등 외국에 전시된 에디션들은 대개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실내에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삼성미술관 플라토가 외벽 전체를 유리로 마감한 글래스 파빌리온 기법으로 되어있어 그렇게까지 답답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여하튼 '구, 로댕갤러리'의 이름답게, 전 세계에 몇 개 없는 로댕의 청동 에디션이 두 개나 우리나라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몇 몇의 미술관,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상설전시를 끈기 있게 진행하는 미술관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광화문 역 근처에 있는데 그 근처에는 언제나 미술전시를 알리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일민미술관 건물 외벽에는 항상 현재 무엇이 전시되고 있는지 소개하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고, 청계천 주변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최근 전시가 소개된다. 모두 특정한 기간에만 열리는 기획 전시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 수 많은 전시들, 한국을 찾은 피카소, 고갱, 고흐, 볼테르,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은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반 년 머물다 다시 한국을 떠난다. 생각할수록 한국에는 상설전시가 없고 그 나마의 상설전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명한 기획전시가 열리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는다. 그러나 그 전시가 끝나면 그 작품은 더 이상 그 미술관에 없고 금세 미술관을 찾은 기억도 산화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그 작품이었지 그 미술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찾은 것 역시 상설전시에 대한 그리움에서였다. 지난 여름 이탈리아 피렌체와 로마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러 미술관과 성당을 참 많이 돌아다녔다. 로렌초 베르니니의 정교한 대리석 조각 작품, 라파엘로와 카라바치오의 그림들이 인상깊었던 로마의 , 보티첼리의 명작을 볼 수 있었던 피렌체의 과 같은 미술관이 참 좋았다. 피렌체에서 두오모에 올라가고 난뒤 근처에 있는 을 찾았는데 거기에 기베르티의 이라는 청동문이 있었다. 로댕이 장식미술관 입구를 상징할 을 제작한 것처럼 기베르티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의뢰받아 산 조반니 세례당의 입구를 상징할 대형 청동문을 만든다. 산 조반니 세례당에도 이 청동문이 남아 있고 두오모 박물관에도 또다른 복제 에디션이 전시되어 있다.

피렌체에서 그 청동문을 본 순간 몇 년 전 로댕갤러리에서 을 본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은 다시 로댕의 작품 앞으로 나를 손짓했다. 미술관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십 년 넘게 같은 작품이 똑같은 장소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것은 묘한 긴장감을 준다.

로댕갤러리 시절 이후로 오랜만에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찾은 그 날. 입구에 전시된 이 희귀한 두 작품만으로 상설전시라고 말하기에 어딘가 긴장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그 기대감은, 지난 십 여 년 넘게 이곳을 방문한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 기대감의 무게는 제법 단단하게 뿌리내려 있다. 그 단단함이 상설전시의 힘이라고 믿는다.

왜 상설전시를 그리워하는가. 사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미술관이 미술관 그 자체로 단단해졌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에 다녀온 뒤 많은 실망감이 들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미술관에서 어떤 전시회가 열리든 많은 관객들이 찾는다. 입장료가 싼 편도 아니지만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하고 유명한 명화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러나 관객들 마음 속에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에 대해 어떠한 인상이 남았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좀 더 많은 이들이 가졌으면 한다.

#로댕갤러리 #플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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