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우리에게는 ‘경쟁’이라는 말이 없었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11.28. 16:59

수정일 2015.11.16. 06:12

조회 738

야경ⓒ작은소망

인생은 그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되기 위한 경쟁이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51

현관문에 전단이 붙어 있다. 얼마 전 새로 생긴 H마트에서 '폭탄 세일'을 한단다. 어제는 C마켓에서 '대박 세일'을 한다고 전단을 돌렸던데, 이른바 '맞불 작전'인 모양이다. 덩달아 한 블록 지나 있는 A마트도 '명품 세일'을 한다고 하고, 좀처럼 자체 할인 행사를 하지 않는 L슈퍼도 '미친 데이'를 선전하기에 바쁘다. 추석 직전 H마트의 개점과 함께 시작된 이 세일 열풍으로 동네 슈퍼마켓들의 식자재 가격은 점점 내려가 한동안 천 원짜리 한 장으로 호박 3개, 가지 5개, 팽이버섯 5봉을 살 수 있었다.

덕분에 밥상이 풍성해지고 식비를 절약할 수 있어 마냥 좋으냐 하면, 아무래도 그렇지만은 않다. '폭탄'이나 '대박'이나 '명품' 세일을 할 수 없는 G마트는 거의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이전까지 G마트는 규모는 작지만 싱싱하고 맛있는 과일로 단골들을 모으던 곳이다. 요란스레 세일을 선전하는 H마트와 C마켓과 A마트도 그다지 실속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제 살을 깎는 출혈 경쟁이다 보니 경쟁자가 먼저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우리 동네 골목의 상권을 둘러싼 이 '작은 전쟁'은 지금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의 축소판이다. 무한 경쟁 속에 승자는 없다. 패자이거나, 아직 되지 않은 패자일 뿐이다.

본디 우리에게는 '경쟁'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중국식 한자어도 조선식 한자어도 아닌 이것은 영어 'competition'을 번역한 일본식 한자어였다. 말이 없으니 뜻도 없었다. 물론 땅과 그로부터 나오는 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갈등, 이른바 계급투쟁은 어느 시대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최소한 만인이 만인에 대한 경쟁자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1883년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 최초로 조선에 '경쟁'이란 말을 도입한 사람은 <서유견문>으로 유명한 유길준이었다. 백 년 전 신조어였던 '경쟁'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주장하는 사회진화론자들이 쓰던 말이었고, 을사조약 체결 이후 유길준은 계몽 강연을 통해 조선이 무지에서 깨어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이야말로 사회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격변기의 개화파 유길준이 처음 들여온 '경쟁'과 이른바 신자유주의시대를 사는 우리가 느끼는 '경쟁'은 그 빛깔과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보와 악한의 싸움에서 사람들은 바보의 어리석음을 악한의 악랄함보다 더 미워한다"는 유길준의 말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우리가 '자발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어 아등바등하는 까닭을 통렬하게 폭로한다. 러셀의 말대로, 정말 우리는 이 가혹한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다만 지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바보보다는 차라리 악랄한 악한이 되기 위하여.

러셀은 경쟁사회에 매몰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불행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 따뜻한 사랑, 열의, 그리고 사소하고 즐거운 일에 대한 열망을 행복의 비결로 제시한다. 기실 대단한 해법은 아니다. 다만 무한 경쟁 사회에서는 그 소박한 것들마저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피해자가 될 것인가, 범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가혹한 쳇바퀴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모험을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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