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청춘의 현실을 그리다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4.10.28. 18:41

수정일 2015.11.17. 19:03

조회 1,873

미생 ⓒ뉴시스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68

케이블채널인 tvN의 드라마 <미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지상파 방송사의 주중 미니시리즈 6편 전체보다 이 작품 하나에 쏟아지는 열기가 더 클 정도다. 캐스팅도 화려하지 않은 일개 케이블 드라마에 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 케이블 드라마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질 기세다.

이 작품은 윤태호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한 웹툰, 즉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장그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프로 입단을 위한 바둑 연구생으로 있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중도포기한 인물이다. 인맥을 통해 대기업 상사의 인턴 직원으로 들어갔으나 그를 기다리는 건 낙하산에 대한 질시와 살벌한 생존경쟁이다.

미생(未生)이란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 등이 살아있지 않은 돌을 뜻한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사석(死石)과는 달리 살아서 완생(完生)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주인공 장그래는 미생과도 같은 미미한 존재이나 완생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바로 여기에 청춘들이 몰입하고 있다.

장그래가 원하는 완생이란 별 게 아니다. 그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 그 사람들이 장그래를 '우리의 일원'이라고 받아들여주는 것. 이 정도의 소박한 소망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다. 양복 입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세계와 장그래의 세계 사이엔 거대한 장벽이 있어서,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벽을 넘기가 힘들다. 그래도 장그래는 한 발 한 발 기를 써가며 벽을 올라간다. 생소한 무역용어 사전을 통째로 외워가며 '제발 나를 좀 당신들의 세상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외친다.

장그래처럼 이렇다 하게 내세울 스펙 하나 없는 처지인 청춘이 부지기수다. 지상파 방송사의 주중 미니시리즈는 그 청춘들을 상대로 신데렐라 로맨스를 판다. 예를 들어 수목 미니시리즈 세 편을 보면, 각각 대형 기획사 사장과 대형 게임사 사장과 국내 최대 한우유통사 사장이 등장해 로맨스를 펼친다. 그중의 한 사장은 천재적 프로듀서 겸 작곡가이고 다른 사장은 초능력자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생>이 청춘의 남루한 현실을 있는 그래도 그려주자 뜨거운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미생>엔 까칠하지만 순정파인 재벌2세 실장님도 없고,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초능력남도 없다. 그저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장인들, 그들이 얼마나 고단한 일상을 보내는지, 그 고단한 일상에 끼지 못해 언저리에서 발버둥치는 청춘의 불안이 얼마나 극심한 지 말해줄 뿐이다.

과거 직장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이렇게 음울하지 않았었다. 청춘을 내세운 드라마들도 이렇게 어둡지 않았다. 직장인 드라마는 서민의 애환을 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분위기였고, 청춘드라마에선 낭만이 화면 밖으로까지 넘쳐흘렀다. 그것이 물론 현실을 과도하게 미화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반영한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한국인은 과거에 확실히 낙관적이었다. 불안에 떠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웬만한 직장인 중에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랬던 세상이 외환위기가 닥치며 무너져 내렸다. 평생 다닐 거라고 믿었던 직장에서 사람들이 잘려나가기 시작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 도래했다. 낭만은 사라졌다. 낙관도 사라졌다. 중산층 의식도 붕괴됐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불안이다. 불안은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서가 됐다.

<미생> 초반부는 바로 그 불안의 직장, 불안의 청춘을 그렸다. 낙관과 낭만이 사라진 대한민국.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린 것이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신데렐라 로맨스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케이블TV가 현실에 육박했다. 지상파도 이젠 현실에 눈을 뜰 때가 아닐까?

#청춘 #미생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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