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신하가 만나던 곳, 창덕궁 회화나무 군

이장희

발행일 2014.10.23. 10:48

수정일 2014.10.29. 18:38

조회 1,794

창덕궁 회화나무

이장희의 사연있는 나무 이야기 1 - 창덕궁 회화나무군

숨 막힐 듯한 서울의 도심 속에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면 갑자기 초록의 낙원이 펼쳐지는 듯 두 눈이 맑아진다. 바로 그 곳에 회화나무 세 그루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이 돈화문에서부터 금천교 일대는 일반적으로 왕실을 위한 사무기관인 궐내각사가 모여있는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곳이다. 왕은 외조에서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관료, 귀족들을 만났다.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중국의 <주례(周禮)>를 보면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이라 하여 특히 삼공(우리나라로 따지면 삼정승)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표지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바로 이 세 나무가 그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토록 의미가 깊은 나무 아래서 임금을 대면하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회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는 군신(君臣)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멋진 수묵화 같은 풍경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비 내리는 궁궐은 또 다른 신선한 느낌을 선사해준다. 툇마루 끝에 걸터 앉아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옛 정취에 대한 감성이 절로 흐르게 마련인지라 스케치를 하는 손마저 덩달아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일부러 궁궐을 찾기도 한다.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금 회화나무 아래 섰다. 꽃이 피는 계절이었지만 나이가 많아서인지 풍성한 느낌은 아니다. 이 세 그루 외에도 주위 다섯 그루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혹자의 말에 따르면 회화나무의 기운도 많이 쇠약해져 한 해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들의 천명이 언제까지 일지 알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자주 만나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빗물에 떨어진 꽃을 주워 물기를 털어내고 가져온 책을 골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아마도 젖은 꽃잎 때문에 책장은 울고, 작은 얼룩마저 생길 것이다. 하지만 훗날 다시금 책을 펼쳤을 때 피어오를 작은 기쁨이 그 자리를 어루만져줄 것이라며 책을 다독거렸다. 400년 돈화문 기와 사이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물이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 <사연있는 나무이야기>는 서울시 E-BOOK(http://ebook.seoul.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사연있는 나무이야기 / 이장희

#창덕궁 #회화나무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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