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갓 쓰고 가마 타고 '무악재' 넘는 사람들

서해성 작가

발행일 2022.09.08. 15:00

수정일 2023.01.0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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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1) 방갓 쓰고 가마 타고 '무악재' 넘는 사람들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무악재 (1907년, <한국의 백년> 수록)
오늘부터 전문칼럼 ‘흐린 사진 속의 그때’가 연재를 시작합니다. 인문학자이자 교수, 사회활동가, 문화기획자인 서해성 작가가 옛 사진에 숨어 있는 생활사를 마치 그 장소로 순간이동을 한 듯 세밀하고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들려주는 코너입니다. 서해성 작가는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사업' 예술감독을 시작으로 서울시와 인연을 맺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을 역임했습니다. 이제 한 달에 한번 흐릿해진 그 시절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이야기꾼으로 찾아올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볼까요?
햇볕 뜨거운 낮
두어 무리 사람들이 무악재 고개를 넘고 있다.
20세기 벽두 어느 여름 낮이다.

햇볕 뜨거운 낮, 두어 무리 사람들이 무악재 고개를 넘고 있다. 20세기 벽두 어느 여름 낮이다. 사진 오른쪽 귀퉁이에서는 방갓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가 구겨지고 땟국 흐르는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옷깃만 보이는 누군가와 동행하고 있다. 사내는 오른손에 둥근 물건을 들고 있는데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차림새로 봐서 행세하는 사람은 아니다. 네 귀퉁이가 패인 갓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행상인이나 상을 당한 남자가 주로 썼다. 갓을 눌러 쓴 얼굴은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어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다. 이들은 지금 홍제동 쪽에서 한양 도성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림자로 봐서 대략 오전 11시쯤이다. 

고갯길이 꺾이고 있는 지점에서는 검은 박쥐 우산을 쓴 사내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두 사람은 입성이 좋다. 때깔 좋은 모시 옷을 입었다. 검은 우산은 햇빛을 가리는 양산으로 쓰고 있다. 당시 새로 들어온 신식 개화 양품이었다. 그래서 양산(陽傘, 해를 가리는  일산)은 곧 양산(洋傘, 서양 우산)이었다.

이들을 따르는 가마가 뒤에 오고 있다. 두 사람이 앞뒤로 들고 있는 이인교다. 가마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무더운 낮임에도 가마가 사방으로 닫힌 것으로 보아 여인네가 탄 가마다. 신행길일 수도 있다. 앞 두 사람의 차려 입은 모습으로 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흑백 사진이라서 그렇지 가마는 주로 붉은 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지붕은 그닥 높지 않고 장식은 수수하다. 여염집 여인이 타고 있는 게다. 가마꾼들은 앞섶을 연 채 거의 웃통을 벗어 젖혔고, 행건도 풀어 치우고 바지까지 달달 걷어붙인 차림이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 터다. 제법 먼 길을 왔고, 더구나 가마를 메고 고개를 올라오면서 버거웠을 터이다. 이날은 햇빛도 뜨거웠지만 습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짚신을 신었고, 앞에 두 사람은 가죽신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워도 깨끗한 버선 차림이다.
소달구지는 새벽같이 땔감 따위를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중턱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 참일 게다.
여름날이란 게 그렇다.

이들 옆으로는 짐칸이 빈 소달구지가 서 있다. 수레 뒤에는 돌 두 개가 있다. 네모 반듯하게 깎아 놓은 걸로 봐서 평소에 쓰는 물건이다. 고갯길에 올라온 소달구지는 왜 비어 있는 것일까? 성안까지 무언가를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일 게다. 돌은 달구지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바퀴를 받치는 용도보다는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돌걸상이다. 달구지나 수레가 이쯤에서 으레 머무르다가 갔다는 뜻이다. 

무악재 아래는 영천장이다.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영검한 샘물이 솟는다고 해서 영천이다. 장이야 여러 물건을 팔지만 의주로를 타고 먼 길 떠나는 이에게 꼭 필요한 떡가게(병점)와 파주, 고양에서 싣고 와서 땔감을 파는 장(나무장)이 크게 섰다. 위치와 규모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영천장은 활발하다. 

소달구지는 새벽같이 땔감 따위를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중턱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 참일 게다. 여름날이란 게 그렇다. 다만 달구지 주인장이 눈에 띄질 않는다. 영천장에서는 70년대까지 땔감을 팔았다. 구멍 뚫린 연탄(가정용 연탄)이 본격화하면서 화목장은 빠르게 소멸해갔다. 그에 따라 큰 나무 한 그루 보이질 않는 사진에 나오는 돌산은 이내 다시 숲이 우거졌다. 

열 걸음 남짓 뒤에는 사내 하나가 걸어오고 있고, 그 옆으로 얼굴 가리개인 흰 장옷을 쓴 여인이 걷고 있다. 둘은 아는 사이로 보인다. 조선시대나 20세기 초까지 모르는 사내와 여인이 횡길에서 나란히 걷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들도 가마 행렬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들 뒤로 사내 두 명이 고갯마루를 향해 걷고 있고, 거의 정상 부분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 더 보인다. 사진 속 사람은 모두 11명이고 한결같이 흰 옷 차림이다.
이 사진 한 장은 그날을 현재화하고 있다.
다시 연출이라도 한 듯 공간과 사람과 사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내력 없는 땅은 없다.

고갯마루를 향하고 있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 전봇대도 동행하고 있다. 사진에서 전봇대 네 개가 보인다. 한반도에 전봇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4년 갑오년이었다. 일제는 청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부산 항구에서 북상하면서 전신을 가설했다. 동학농민군들은 침략자 일제와 싸우면서 이 전신주를 톱으로 베어 쓰러뜨리거나 전선 절단, 돌을 던져 통신선이 연결된 부분에 사용하는 사기 애자(碍子, 전선을 지탱하고 또 절연하기 위하여 기둥 따위 구조물에 장치하는 제구)를 깨뜨리는 방해전술을 구사했다. 일제는 이를 발견하면 현장에서 한국인을 총살했다. 

이 사진 한 장은 그날을 현재화하고 있다. 다시 연출이라도 한 듯 공간과 사람과 사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이 고개 아래 도착하면 딱 정오 무렵이다. 그 어름에는 초가 지붕 끝에 함석 차양을 내어 단 주막이 있었다. 함석은 그 무렵 이 땅에 처음 들어왔다.

의주로를 따라 더 내려가면 그해 여름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서소문이었다. 군대해산 명령이 떨어진 것은 그해 7월 31일 밤이었고, 8월 1일 군인들은 이에 맞서 총을 들고 시가전을 펼쳤다. 고개를 넘은 이들은 주막이나 근처에서 뒤숭숭한 소문을 듣거나 의견을 나누면서 분개하고 또 불안에 떨었을 게다. 

무악재와 바로 뒤 산골고개는 거듭 깎아내서 오늘날 높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제법 가파른 재였다. 도성에서 가까운 고개라서 숱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악재 어디메에 이 사진 한 장 붙여 놓고 설명을 해주는 게 정녕 어려운 일일까. 못내 아쉽다. 내력 없는 땅은 없다. 
무악재
독립문에서 바라본 무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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