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첫 그림선생을 만나다

시민기자 윤혜숙

발행일 2021.08.12. 17:48

수정일 2021.08.25. 13:44

조회 6,500

이제 막 재미있게 살려고 하는데...
미술 선생, 내가 딱 2년만 더 살면 좋겠는데...
- '못다 핀 꽃' 中 -

이 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살았던 강덕경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뱉은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울컥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9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첫 번째 미술선생이었던 이경신 작가를 온라인에서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첫 번째 미술선생이었던 이경신 작가, 현재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치료수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첫 번째 미술선생이었던 이경신 작가, 현재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치료수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경신

이 작가는 지난 1993년부터 5년 동안 나눔의집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에게 미술 수업을 진행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 <못다 핀 꽃>이다. 삽화에는 할머니들의 그림에 작가가 그린 할머니들의 모습이 더해져 있다. 이는 작가가 할머니들에게 받은 믿음과 사랑을 추모하는 작업이면서, 할머니께 드리는 일종의 '헌화'이다. <못다 핀 꽃>은 미술수업을 하던 그 시절을 한참 지나 2018년 8월 13일 세상에 나왔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이 제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대 때 이 책을 썼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 거예요. 그동안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할머니들을 여성으로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나이는 15세 전후의 세상 물정 모르는 앳된 소녀에 불과했다. 작가는 아이가 중3일 때 이 책을 쓰면서 아이 또래의 소녀였던 할머니들이 겪었던 불행이 떠올라 할머니들이 더욱 애처롭게 생각됐다. 
이경신 작가가 할머니들을 만난 건 미대를 막 졸업한 즈음이었다. ⓒ안해룡(좌)/ ⓒ한태환(우)
이경신 작가가 할머니들을 만난 건 미대를 막 졸업한 즈음이었다. ⓒ안해룡(좌)/ ⓒ한태환(우)

책의 첫 문장은 ‘내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2월 중순이다. 그때 나는 미대를 막 졸업한 참이었다’로 시작한다. 대학생이었던 이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뉴스로 접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피해를 당하신 할머니들에게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다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집에서 한글 교사를 구한다는 말에 이끌려서 나눔의집을 방문했다. 

과거 끔찍한 일을 당했던 할머니들은 손녀뻘 되는 작가의 방문에 사뭇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낯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애쓰고 계셨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고통스러웠어도 겉으로 보이는 할머니들은 여느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작가는 전공을 살려서 그림을 매개로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에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이 나이에 뭔 그림이여!”, “늙어서 낼 모레면 죽을 판에 이기 무슨 호사고.”, “치아라~ 머리 아프다.” 라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붓이나 연필을 쥐어본 적이 없는 할머니들이었다. 수업은 붓을 들고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했다.  
강덕경 할머니가 일본군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상처를 '빼앗긴 순정'으로 표현했다.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강덕경 할머니가 일본군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상처를 '빼앗긴 순정'으로 표현했다.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서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힘든 일을 겪어야 했던 할머니들은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였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외면 받다시피 하면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꽁꽁 감춰둔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들이 미술 수업을 하면서 달라져갔다. 지난 50년간 수치심과 분노가 뒤엉켜 내밀하게 감춰두었던 자신의 상처를 작품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강덕경 할머니는 미술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셨어요. 할머니는 새를 동경했는데, 그래서인지 할머니 그림에는 새가 많이 등장합니다. 김순덕 할머니는 ‘내가 그림을 배우다니 소가 웃을 노릇’이라면서 신기해하셨고요. 이용녀 할머니는 대범하고 활달한 성격답게 그림도 시원시원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다른 할머니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셨죠.” 

필자는 처음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감'을 보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 일본군에게 강압적으로 끌려가는 소녀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서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김순덕 할머니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이렇듯 할머니들의 작품에는 작품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에는 소녀의 두려움과 떨림이 담겨 있다.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에는 소녀의 두려움과 떨림이 담겨 있다.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책의 제목 '못다 핀 꽃'은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할머니들은 이 제목을 좋아했다. 김순덕 할머니는 피지 못한 목련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도 운명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순박한 꽃봉오리처럼 여리고 슬픈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책의 제목 '못다 핀 꽃'은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 '못다 핀 꽃'은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못다 핀 꽃>은 지난 5월 일본어판으로 출간됐다. 한일간에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희생이 보상받을 수 있길 바라건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렇기에 <못다 핀 꽃>의 일본어 번역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웠던 상처와 그것을 극복하려했던 노력을 가슴깊이 이해하기를 희망한다.  
하얀 캔버스 앞에서 과거와 마주하며
긴 세월 감춰두었던 깊은 상처와 간절한 염원을
그림으로 쏟아내던 순간,
할머니들은 그 누구보다 밝고 맑게 빛났다.
- '못다 핀 꽃' 中 -

이 작가와의 인터뷰는 필자가 책을 읽을 때처럼 가슴이 먹먹했던 시간이었다. 할머니들의 상처가 그림이 되는 순간을 오롯이 지켜본 작가의 감동과 떨림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고,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 전에 할머니들이 겪었던 슬픔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이경신 작가의 <못다 핀 꽃>을 읽어보고, 나눔의집(http://www.nanum.org/main/ )에 전시된 할머니들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나눔의집을 방문하기 어렵다면 책이나 인터넷으로 할머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필자가 그랬듯이 할머니들의 작품에서 할머니들이 겪어야했던 한 많은 사연까지 보일 것이다.

미술수업에 참여하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던 강덕경 할머니, 김순덕 할머니, 이용녀 할머니는 지금 고인이 되었다. 현재 총 14분의 할머니가 생존해 계신다.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미술수업에 참여했던 강덕경, 김순덕, 이용녀, 이용수 할머니
미술수업에 참여했던 강덕경, 김순덕, 이용녀, 이용수 할머니 ⓒ이경신, 휴머니스트 제공 ('못다 핀 꽃' 中)

시민기자 윤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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