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상쾌한 새벽을 달린다
구승모
발행일 2013.12.05. 00:00
서울형 기초보장제도, 인생이모작지원센터, 올빼미버스 등 시민 말씀대로 탄생한 10가지 정책을 직접 경험한 체험담, 영상, 그리고 웹툰을 공모하는 <제7회 서울사랑공모전>이 지난 10월에 있었다. 서울톡톡에서는 그 중 이야기부문에 선정된 13편을 매일 한 편씩 소개한다. |
[서울톡톡]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백설 공주는 꿈같은 순간을 뒤로 하고 이젠 나와야한다. 그녀가 입고 온 순백의 드레스는 누더기로 변할 것이고 그녀가 타고 온 호박마차는 다시 호박이 될 것이며 호박마차를 끌던 위풍당당한 말들은 쥐가 되어 도망칠 것이다. 백설 공주는 사랑의 꿈을 꾸었지만 종소리가 그 꿈을 훔쳐 어둠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마침내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고 호박마차는 호박이 되었다. 나도 그럴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나는 누더기를 걸치고 밤길을 헤매는 쥐가 될 것 같았다.
여자 친구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늘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오목교역에 살았고 나는 회기역에 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5호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환승해 1호선을 타고 왔다. 시간은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주로 막차를 타고 돌아올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나는 파김치가 되고 시루떡이 되었다. 밤길에 그녀 혼자 어두운 골목길을 걷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서로 애틋했기에 1분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다보니 거의 항상 나는 막차를 탔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다보면 가끔씩은 지하철이 끊기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영화를 보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1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5호선을 탈 순 있어도 환승해서 1호선을 탈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그녀는 핸드폰을 잠시 만지작하더니 환한 핸드폰 화면을 내 얼굴에 쏘면서 말했다.
"심야버스 생긴 거 몰랐구나? 음. 여기 종로까지 5호선을 타고 가서 N26 심야버스로 갈아타면 되겠다. 집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바라고 특히 어둠이 찾아오면 더 바랐던 심야버스가 생겨 12시부터 5시까지 운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심야에 버스가 운행하는 일은 월드컵 기간에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최소한 한강불꽃축제 정도는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는 안심하며 집에 들어갔지만 난 사실 불안했다. 어디에 심야버스 정류장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타야하는지 요금은 얼마인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검색해보니 인터넷에서 모든 정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안심하고 5호선에 몸을 실어서 종로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다. 종로에서 심야버스를 찾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내게 만약 스마트 폰이 없었다고 해도 야심한 도심의 도로에서 호박마차처럼 환히 빛나고 있는 이 유일한 버스를 놓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호박마차는 새로운 마법에 걸려 자정이 넘어서도 호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버스가 내 앞에 섰고 문이 열렸다.
"기사님, 이 버스 회기로 가나요?"
난 어린 아이가 분명했다. 어두운 공기가 나를 2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것 같았다. 이 호박마차는 새로운 마법에 걸렸음에도 종이 울리기 전에 비해 요금이 두 배도 채 넘지 않았다. 새벽 버스 안의 풍경은 내게 많은 영감을 샘솟게 했다.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은 창문틀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넥타이는 이미 반쯤 풀려있었고 딱 그만큼 그의 눈이 풀려있었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났지만 그것은 정확히 그가 고생한 만큼이었다. 한 남학생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보고 있었다. 가까운 곳보다는 먼 곳을 보고 있었고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을 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낯선 듯이 바라보며 오늘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눈이 맑았으므로 나는 그가 머지않아 어두운 곳도 보고 가까운 곳도 보고 낮은 곳도 보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둡고 낮고 가까운 곳은 바로 버스의 가장 끝 좌석에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네팔이나 파키스탄 아니면 방글라데시에서 왔을 외국인 노동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들은 조금 더 어두운 색의 옷을 입었지만 그보다는 밝은 피부를 가졌고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맑은 꿈을 가졌다. 새벽의 버스에서 그들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휴식의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이내 포기했다. 그들에게는 이 순간이 오늘의 첫 휴식시간일 수도 있었다. 아이를 옆에 앉게 하고 자신에게 기대도록 한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아이는 지금은 잘 시간이라는 듯이 엄마에게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엄마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아이에게 편히 잠을 재우지 못해서 생긴 그런 종류의 걱정은 아니었다. 전통시장 근처에서는 할머니들이 많이 탔다. 할머니들에게서는 흙과 풀과 땀 그리고 사람의 냄새가 났다.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냄새들 중 하나이자 모든 생명의 시작이 되는 냄새였다. 오늘도 그녀들이 가지고 나온 채소는 다 팔렸는지 짐은 많지 않아보였다. 연신 끙끙대면서 자리 앉았고 때로는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한바탕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무사히 내렸고 버스는 나를 태운 적이 없는 것처럼 어둠 너머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어둠속에서 바퀴가 구르고 빛이 흩어져 그 뒷모습이 꼭 호박마차 같았다. 새벽의 공기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들어왔다. 나는 맑아지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마법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집까지 걸으면서도 버스 안에서 바라본 동대문이 떠오르고 옆으로 스치는 네온사인들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생각이 멈췄다. 만약 심야버스가 없었더라면 버스에 타고 있던 나와 그 사람들의 밤은 어땠을까? 다시 쥐가 되어버린 말처럼 어둠 속에서 누더기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책 <파피용>에서 "낮에는 기껏해야 수십 킬로미터 정도 밖에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밤에는 몇 백만 킬로미터 떨어진 별들도 눈에 보이죠."라고 말했다. 밝을 때 빛나는 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이 내린 뒤라면 얘기가 다르다. 심야버스는 서울이 별이 되고 있었다. 별처럼 서울 곳곳의 밤을 비추는 심야버스가 고맙다.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늘 가능했던 일들이 상상력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제야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서울시의 상상력은 어둠 속의 별처럼 심야버스처럼 그리고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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