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라 그래, 아홉수라서!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6.27. 00:00

수정일 2014.10.05. 19:40

조회 1,435

메마르고 갈라진 땅에 핀 예쁜 코스모스 (사진 뉴시스)

만일 당신이 지금 지옥을 걷고 있다면, 계속해서 걸어가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서울톡톡] 얼마 전 인기 있는 개그프로그램에 두 명의 개그우먼이 등장해 온갖 시련(극중에서는 주로 그녀들의 '외모'와 관련된 '학대'에 가까웠지만)을 겪은 후, "아홉수라 그래, 아홉수라서!"를 외치는 코너가 있었다. '아홉수'는 9, 19, 29와 같이 아홉이 든 나이에 운수가 사납다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이와 유사한 액운으로는 '삼재(三災)'가 있는데, 태어난 해를 십이지(十二支)로 따져서 9년마다 한 번씩 3년간의 불운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심각하게 믿는 이들도 있고 미신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사람의 한살이에서 유난히 괴롭고 힘겨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기가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잘 풀리지 않고 뜻밖의 사건과 사고가 잇따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길이 없어 막막하고 지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 허덕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조차 괴롭고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악몽 같다. 그것이 바로 살아서 겪는 지옥, 생지옥이다.

이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아예 겪지 않거나 겪는대도 미풍처럼 살짝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운명은 나에게만 이런 폭풍우 같은 시련을 주는 것일까? 불행을 한탄하며 행운아들에게 배신감과 질투를 느낀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때, 크나큰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버리고 만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의지가 없으니 팽팽하게 당겨진 고통의 끈을 한순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살아서 도망칠 곳은 없다. 죽음으로 영원히 도망쳐버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불굴의 영웅이거나 냉혹한 제국주의자로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이 생지옥을 견디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 해결책은 단호하고도 간단하다. 발걸음을 멈추지 말고 지금 걷는 그 지옥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라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의 지혜를 믿는다면, 언젠가는 그 어둡고 질척한 굴길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니.

곱씹을수록 과연 그렇다. '바닥을 쳤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의 진짜 근기가 드러난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그 바닥을 짚고 일어나고, 주저앉아버린 사람은 그 바닥에서 더 깊은 땅굴을 파고 들어간다. 다리를 세워 일어나 걷지 못한다면 자기 손으로 판 굴속에 매장되어버린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일컫는다. 괴로움이 끝이 없는 고통의 바다라는 것이다. 불운과 불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행운만을 거머쥐고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지금 여기의 삶이 보배롭다. 꽃길이 아니라 진창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아직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축복이리니.

삶이 신비로운 것은 불운과 불행마저 지나고 나면 새로운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지옥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된다. 멈추지 않고 걸었던 만큼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걷다 보면 달릴 수 있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 날아오를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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