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가족답기 위해선 애써 노동해야 한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5.23. 00:00

수정일 2014.10.05. 19:51

조회 1,917

부부(사진 wow서울)

가족은 감정노동 공동체이다. 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중에서

[서울톡톡] 세상의 기준으로 이른바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한 정신과 의사는, 그들의 고민 중 90퍼센트 이상이 '자녀(그 중에서도 특히 아들)와의 관계'라고 말한다. 필부필부가 그러하듯 그들도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한다. 하지만 반항적인, 무기력한, 부모를 부정하고 세상을 냉소하는 자식들 때문에 일에서는 성공했지만 삶의 회의를 느낀다는 것이다.

세상과, 주변인들과,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었는가와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한다. 일상적으로 충만하고 본질적으로 행복하다. 어려움을 겪어도 주위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쉽게 일어난다. 하지만 실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일상적이자 본질적으로 겪는 고통 또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임의로 주어진 가족과의 관계는 중요한 만큼 어렵고 미묘하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뒤틀린 가족들끼리 치고 박는 막장드라마와 가족에 대한 사랑에 의지해 역경과 고난을 이겨냈다는 휴먼드라마가 동시에 방영된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당신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인가요?"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혹은 글썽글썽 눈물지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거나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일본의 배우 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인터뷰에서 내뱉은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는다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대답에 남몰래 통쾌한 기분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사회 구성단위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다. 힘이면서 짐이고, 자연적이고 근본적인 듯 인위적이고 의무적이다. 가족의 갈등과 해체가 문제시될수록 한편에서는 가족의 '신성불가침성'이 강조된다. 한국 사회의 가족 의존도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복지의 대부분을 가족에게 떠넘긴다. 육아의 짐, 교육, 간병, 부모의 노후가 모두 가족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부모에게 종속된 채 '개인'이 될 기회를 저당 잡히고, 부모는 자식들의 양육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고, 스스로 선택한 유일한 가족인 부부는 더 이상 가족의 중심이 아니며, 늙은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담의 대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겁고 버겁다. 너무 많이 주고 너무 많이 잃는다.

이 총체적인 위기에 대해 사회학자 엄기호는 쓰라리지만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가족이 가족답기 위해서는 무급의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노동해야 마땅하다고. 돌봄과 보살핌을 바라며 무책임하게 쉬는 대신 가족을 통해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서로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가족이 정말 감정노동의 공동체라면 남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은 분노의 민낯으로 으르렁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배려와 친절과 염려와 사랑이야말로 힘겨운 노동과 비싼 노력의 결과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서로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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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가족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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