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당하면 억울하니까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5.16. 00:00

수정일 2014.10.05. 19:59

조회 1,779

조용철 포토에세이 `마음풍경` 중 (사진 뉴시스)

위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 것이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도록 하지 말 것이다.
앞에서 싫어하는 것을 뒷사람의 앞에 놓지 말고,
뒤에서 싫어하는 것인데도 앞사람을 따르도록 하지 말 것이다.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왼쪽과 사귀지 말 것이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오른쪽과 사귀지 말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일러 혈구지도(絜矩之道)라 한다.

--《대학(大學)》 제10장에서

[서울톡톡] 유교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혈구지도'는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곱자를 가지고 재는 방법'이다. 곱자란 나무나 쇠를 이용해 90도 각도로 만든 'ㄱ'자 모양의 자를 가리키는데, 집을 지을 때 목수들은 이 곱자를 이용해 치수를 잰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만큼이나 정확하고 치밀하게,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헤아리라는 뜻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들이 좋아할 리 없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 그렇다면 내가 받았던 부당한 처우와 억울한 대접을 남에게 돌려주지 않도록 애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기묘한 일은 "종이 종을 부리면 식칼로 형문(刑問)을 친다"는 속담처럼, 남에게 눌려 지내던 사람이 귀하게 되면 전날을 생각지 않고 아랫사람을 더 심하게 누르고 모질게 대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자기 며느리에게 더욱 모진 시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다. 졸병 시절 상급자에게 당했던 호된 기합을 자기의 하급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 야릇한 망각의 밑바탕에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전치(displacement)'가 작용한다. '전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전치'는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전혀 다른 대상에게 옮겨 충족하려는 것으로 설명된다. 정작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일찌감치 놓쳐버렸다. 원망할 대상도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마음에 묵혀두었던 복수심으로 엉뚱한 곳에 앙갚음을 하는 것이다. 내가 당한 만큼 남에게도 돌려주고자 한다. 나만 당하면 억울하니까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내 상처 받은 자존심을 남에게 고통을 주는 가운데 달래려 한다. 그래서 '전치'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양 만들기'가 뒤따른다. 언젠가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억울하고 분하고 괴로운 희생 제물이. 그렇게 악습의 물림, 악순환이 계속된다.

본디 《예기》의 한 편(篇)이었던 《대학》은 조선의 유생들이 성균관에 들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경전이었다. 올바른 선비의 길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제시하는 《대학》은 수많은 덕목 중에서도 '혈구지도'를 으뜸으로 꼽았다. 나라를 잘 다스려 천하를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남의 마음을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혈구지도'는 이성의 작용에 의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공감이자 연민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수록 오히려 행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내 마음자리를 돌아보며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짚어 봐야 한다. 턱없이 얕은 내 마음의 깊이를 재는 정밀한 곱자를, 언제 어디서나 잊지 말고 챙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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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대학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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