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모르면 청춘도 알 수 없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4.11. 00:00

수정일 2014.10.05. 20:08

조회 1,937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시몬느 보봐르 《노년(La Vieillesse)》 중에서

[서울톡톡] 얼마 전 모처에 급하게 서류를 보낼 일이 생겨 '지하철 퀵 서비스'를 이용했다. 일반 택배보다 빠르고 오토바이 퀵 서비스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니 인터넷을 뒤져 서비스를 예약했다. 그런데 예정 수거 시간을 훌쩍 지나 도착한 기사님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아파트 숲에서 길을 잃어 한겨울에 땀범벅이 되도록 한참을 헤매셨단다.

하긴 아파트에 무슨 무슨 데시앙이니 이차저차 쉐르빌이니 하는 국적불명의 이름들을 붙이는 까닭이 시부모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웃지 못 할 음모론이 블랙 유머로 떠도는 바에야! 시간이 촉박해 안절부절못하며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순간 맥없이 식었다. 알고 보니 지하철 퀵은 무임승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인 인력을 이용해 가격을 내린 서비스였다. 부랴부랴 음료수를 건넸지만 그조차 여유 있게 마시지 못하고 다급히 돌아서는 굽은 등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런 노동이나마 할 수 있는 분들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률, 노인 자살률 1위의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온종일 무거운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모으고 다니는 노인들의 일당은 하루 9천 원,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커피 두 잔 값이다. 하지만 궂은 날씨와 위험한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을 멈출 수 없는 노인들이 전국에 140만, 놀랍다 못해 슬픈 일이다. 슬프다 못해 무서운 일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과 별반 상관없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이야기지만, 정말 노인들에게 이 나라는 잔혹한 스릴러 영화보다 더 무섭다.

2026년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퍼센트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지금 당장 우리가 노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해결에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처지가 딱해서 만이 아니다. 불행한 미래는 현재도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여성주의의 고전인 《제 2의 성》을 쓴 시몬느 보봐르가 하필이면 인생의 황혼인 '노년'에 주목한 이유는, 여성을 알지 못하면 남성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년을 모르면 청춘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보봐르는 노년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낸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육체조차 순수한 자연이 아니기에,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고.

인간적인 품위와 자기 삶과의 화해와 연장자로서의 존경을 지키는 노년을 꿈꾼다면, 그것을 당장에 내 주위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깊은 연륜으로 아름답고 너그러운 노년의 삶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 어떤 경험과 지혜를 쌓아야 할는지를 알 것이다. 고통스럽고 빈곤하며, 세월의 더께가 앉아 더욱 완고하고 편협해진 노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피할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늙어 보이고, 기를 쓰고 천천히 늙고, 어떻게든 늙은 것을 숨기려는 세상에서는 청춘조차도 마음껏 젊을 수 없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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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김별아 #노인일자리 #노년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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