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한인동포 귀국을 위해 애쓴 독립지사

시민리포터 이승철

Visit2,382 Date2012.09.20 00:00


[서울톡톡] 북한산 둘레길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우리나라의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상산 김도연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고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섰다. 잠깐 걷자 오솔길 3거리가 나타난다. 왼편 솔밭공원 방향으로 가는 이정표 아래 강재 신숙 선생의 묘역으로 가는 이정표도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 200여 미터를 걷자 신숙 선생의 묘역이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강재 선생에 대한 두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애국선열 강재 신숙 선생, 경기도 가평 출신 독립운동가였으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 배포를 하였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관여했고 활동을 지원했다. 1930년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안내판에는 글과 함께 콧수염을 기른 강직해 보이는 강재 선생의 사진도 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강재 신숙 삼본주의(三本主義), 민본정치(民本政治)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 건설, 인본문화(人本文化) 창달(暢達). 192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통일당을 조직하고 수령에 올라 삼본주의를 제창하고 당의 강령으로 채택함’이라 쓰여 있다. 강재 선생의 묘역 풍경도 다른 애국선열들 묘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봉분 두 개가 나란히 안치된 것과 양의 모습을 한 석재 조형물, 그리고 특이한 문양의 망주석이 눈길을 끌었다.


강재 신숙 선생은 1885년에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아명은 연길이었으며, 열두 살 때는 태봉이라 하였고 스물한 살 때는 다시 태련으로 고쳐 불렀다. 선생은 아명이 셋이나 되는 특이한 분이다. 신숙이란 이름은 1920년 35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호도 셋이나 된다. 강재라는 호 외에도 시정과 치정이라는 호가 있다. 강재 선생은 어렸을 때인 12세 때부터 14세까지 당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던 이규봉에게 한학을 공부했는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총명했다고 전한다. 16세 때부터는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약정대리를 지내기도 했으며 18세 때 가평군청 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세 되던 해에 강원도 양구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최도환의 딸인 최백경과 결혼했다.


어릴 때부터 조용히 사색하기를 좋아했던 선생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당시는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이끌었는데 국제정세를 이용한 보국안민과 한국독립을 주장하는 백만 교도 단결을 호소하는 주장에 이끌려 동학에 입교했다. 이후 그의 삶은 평생을 동학과 함께 한다.


어린 시절 천재 소리를 듣던 청년, 동학교도가 되다


선생은 서울로 상경한 후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경무청의 순검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구시대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다. 그리고 다시 ‘국민일보’ 기자로 취직을 했지만 친일매국 신문에서 그가 쓸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결국 반년 만에 기자생활도 청산했다. 선생은 1907년부터 민영순의 소개로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뜻 있는 지식인들은 민중 계몽을 위해 학교세우기에 앞장섰다. 선생도 인쇄국에 근무하면서 김남수, 김남규 등과 서울 청파동에 문창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을 맡아 육영사업에 진력하는 한편, 애국단체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선생은 정한교와 함께 친일파 일진회장 이용구를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저격사건으로 강화된 경계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강재 선생은 이후 천도교종학강습소 강사와 천도교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을 거쳐, 1914년에는 천도교 대구대교구장을 역임했다. 1917년에는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역사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게 된다.


3·1운동 거사를 목전에 둔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은 것이다. 3·1운동 직후 선생은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등이 조직한 대동단에 가입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적발 구금되어 1차 수난을 당한다.


국내에서 독립 투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이때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천도교 측 연락 임무를 선생이 담당했다. 그해 5월 선생은 이인숙, 정광조 등 천도교 간부 28명과 함께 경성헌병대에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끈질긴 심문을 당한 후 석방되자 국외망명을 결심했다.


1920년 4월 선생은 신상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서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상하이에 도착한 선생은 임시정부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일단 보류하고 다시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당을 조직하여 수령으로서 민본정치, 노본경제, 인본문화를 주창한 강령을 만들어 통일당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했다.


통일당은 신숙 선생을 총리에, 최동오를 정치부장에,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민창을 선임했다. 이 시기는 만주 지역에 수많은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주도권 다툼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선생은 이들 독립단체와 독립군을 일원화하여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토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독립군의 참모장을 맡아 부대를 이끌었다.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한때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만주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선생은 해방된 조국으로 곧장 귀국할 수가 없었다. 해방을 맞았지만 소련군이 만주에 진주하면서 치안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한인 동포들의 안전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만주지역 동포들의 안전과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을 돕다


길림성 조선인 회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조선인 피난민의 수습과 귀국 희망자의 알선, 그리고 소련군이 한인동포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게 위해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협상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등 한인동포들의 신변안전과 귀국을 돕는 일에 진력하였다.


1946년 12월 선생은 미군정이 주선한 마지막 난민수송선을 타고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선생은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동해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동포들의 귀국을 위해 앞장섰다. 1947년 6월 선생은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8년 4월에는 남북협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는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종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958년 3월에는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동학당을 결성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표책임위원으로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과도내각 때 실시된 7·29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선생은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회복하지 못하고 1967년 11월 22일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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