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조국에서 굴곡 많은 야당정치인으로 살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9.11. 00:00

수정일 2012.09.11. 00:00

조회 2,277

[서울톡톡] 올여름 유난히 심했던 무더위가 한풀 꺾인 9월 초순,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는데도 산길을 걷노라니 이마와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숲속을 파고드는 바람결이 풋풋하고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것이다. 동암 서상일 선생 묘역을 지나 황토 흙길 200여 미터를 더 걷자 역시 왼편 산자락에 묘지 1기가 나타난다. 상산 김도연 선생의 묘역이다.

묘역 입구에 서 있는 선생에 대한 안내판에는 '애국선열 초대 재무부장관 상산 김도연 선생, 호는 상산.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일본 동경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서 11명의 대표 중 한사람임. 입법의원과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장관을 지내고 3·4·5대 민의원과 6대 국회의원을 지냈음'이라 쓰여 있다. 무덤 앞에는 작은 컵에 담긴 꽃송이들과 함께 묘역 귀퉁이에서 피어난 무궁화 꽃나무 한 그루가 곱고 싱그럽다.

상산 김도연 선생은 1894년 6월 16일에 경기도 김포 양동면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포의 부유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무렵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조금 더 성장한 후에 신식 교육기관인 태극학교에 입학했으며, 태극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보성중학교에 진학했다.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긴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긴조중학교 재학 중에는 '반도중학회'라는 학생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합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에 진학한 그는, 신익희,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이 창립하여 주도하던 유학생들의 중추조직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 활동했다.

어린 학생시절부터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애국지사

또 'YMCA 한인 청년회'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18년 1월에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부 개선 때 백남훈, 전영택 등과 함께 이 모임의 서기로 선출되어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해 겨울 도쿄에 있는 YMCA강당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온 서춘, 이종근, 윤창석, 등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하나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선생도 웅변대회에 참가한 것은 물론이다. 웅변대회를 마친 유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국의 자주독립 방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선생은 이 모임을 기회로 최팔용, 백관수, 김철수, 이광수, 송계백, 최근우, 서춘, 이종근, 김상덕 등과 함께 모임의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일본 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비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감시를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선생은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 1918년 12월 1일자 기사를 통해 이승만 등 한국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무된다. 선생은 유학생 대표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에 대한 방안 모색과 열망으로 심도 있는 토의를 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초, 최팔용, 윤창석, 김상덕 송계백, 백관수, 전영택, 최근우, 서춘, 이종근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달인 2월 8일을 기해 '재일본동경조선독립청년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공표키로 하는 한편, 본국의 민족지도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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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역사적인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이광수와 김철수가 참가한 조선독립청년단 대표 11명이 주도한 '독립선언식'이 도쿄 한 복판에 있는 YMCA 강당에서 열렸다. 행사는 유학생학우회 회장인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동의했다. 이어서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선생은 결의문을 낭독했다,

뒤이어 서춘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역설하기 위한 연설을 하기 위해 등단하려 할 때 도쿄경시청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행사를 계속하려는 유학생들과 해산시키려는 일본경찰 사이에 대격돌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참석 유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선생도 체포되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죄'로 금고형 9개월을 선고받고 도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이 사건에 의한 수감생활로 1919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했다.

옥고를 치른 후부터 일본경찰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선생은 결국 1922년에 미국으로 또 다른 유학길을 떠난다.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생활에서는 '삼일신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2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하다가 1934년에 조선흥업주식회사을 창립하여 취재역 사장으로 취임했다. 1938년에는 이승만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선생은 1940년 5월부터 조선총독부가 강요한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고 거절하여 조선총독부경찰의 감시대상인 불령선인 2호로 지목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1년 12월, 일제는 국내 반일인사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자로 구속 수감되어 또 다시 2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45년 봄에 풀려났다.

상산 선생은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민주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해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굴곡 많은 야당정치인으로 살다

그는 이승만의 남한 단정수립을 지지했으며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한 후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49년 한민당에서 민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후 야당 노선을 걸었다.

6,25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고, 민주 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민주당 구파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1958년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제5대 국회에서는 부의장을 역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63년 장면, 현석호, 조재천, 박순천, 오위영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1969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야당 정치인으로 살았다.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수유리 북한산자락 지금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선생이 별세한 직후 '상산김도연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으며, 그 뒤 '상산김도연선생숭모회'가 결성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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