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문제겠느냐!”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8.16. 00:00

수정일 2012.08.16. 00:00

조회 3,577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쳐 죽일 역적 놈들 같으니라고, 오늘부터 역적 박제순의 집안과는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선생의 비분강개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였다. 당시 외교를 담당한 외부대신은 을사5적 중 한 명인 박제순이었고 실무 담당인 교섭국장은 성재 이시영이었다. 그러나 실제 조약체결은 실무책임자인 이시영을 완전히 배제시킨 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을사5적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일제의 강요로 조약체결이 추진되자 이시영은 조목조목 부당함을 강조하며 결사반대했다. 그는 당시 조약체결의 실무책임자인 교섭국장을 맡고 있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을 만날 때마다 조약체결 반대 입장을 밝히며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일제와 결탁한 박제순 일당은 궁궐을 일본군들이 포위한 가운데 치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시영은 낙망했다. 10년 만에 관직에 나아갔던 그였지만 미련 없이 교섭국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는 형제들과 함께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사랑하는 조국을 떠났다.

국가적인 치욕과 망국의 소용돌이가 한반도를 휩싸고 돌던 구한말, 당시 조선 최고의 명문거족 한 집안이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만주로 떠났다. 바로 성재 이시영선생의 형제들과 가족 식솔 등 60여 명이었다. 이들이 만주에서 세운 학교가 훗날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흥무관학교다. 이시영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매국노들에 의하여 외부 교섭국장도 배제하고 체결된 을사늑약

이시영 선생의 묘역 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애국선열 이시영 선생, 서울출신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 동포 사회의 일을 다루는 기관인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현 경희대의 시초)를 설립하였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법무, 재무 분야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 통치에 반대하여 사직하였다.'는 내용이다.

묘지로 오르는 돌층계 오른편 아래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란 비문이 쓰여 있는 비석이 서있다. 가파른 돌층계를 오르면 석재로 둘러쳐진 무덤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양쪽에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각각 한 개씩 서 있다. 묘역을 둘러보고 뒤돌아서 바라본 묘역 입구풍경이 우거진 숲속의 싱그럽고 짙은 음영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성재 이시영 선생은 구한말 고종 6년인 1869년 12월 3일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본명은 성흡, 호는 성재다. 그는 선조 임금 때의 명재상으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했던 백사(오성) 이항복의 후손이며,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이다. 1885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1886년 가주서를 거쳐 1887년 형조좌랑을 지냈다, 1888년에는 세자익위사익위로서 서연관이 되었고, 1891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부승지에 이어 우승지에 올랐다.

후에 참의내무부사, 궁내부 수석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사직하였다가 1906년엔 평남 관찰사로 등용되기도 했다. 1908년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과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료생활을 하고 있던 1907년 친형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 전덕기(상동교회 목사), 이동녕 등이 신민회를 조직하자 관료신분이었지만 이에 가담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국내 관료생활은 그것으로 끝났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 명문가 6형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오르다

1910년 경술국치로 한일합방에 의해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6형제의 망명길은 넷째인 이회영과 다섯째 시영 형제가 주도했다. "국가가 망했는데 가문이 문제겠느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우리 가문을 기꺼이 던지자'는 것이 이들이 의기투합한 명분이었다. 만주로 망명한 그들 6형제는 맏이인 이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 넷째 회영, 그리고 다섯째 시영과 일곱째 호영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만주 서간도 지방인 류허현 삼원보에 자리를 잡고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써 3500여 명을 배출하였다.

이시영 선생은 그 후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부장과·재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재무부장으로 임시정부의 재정조달과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6형제의 망명생활과 독립운동은 항상 죽음과 고난이 함께하는 역경의 길이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들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선택한 독립운동과 망명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다른 친일파들처럼 눈 딱 감고 일제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더라면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 부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제는 이시영에게 중추원 참의와 귀족작위를 내리겠다며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형제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과 망명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망명 독립운동의 길은 돌아온다는 기약이 전혀 없는, 어쩌면 죽음의 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해방된 조국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여섯 형제 중 오직 한 사람 다섯째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실제로 당시 대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더구나 명문가나 권문세가 형제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망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5년 후인 1915년에 역사서 한국통사를 쓴 박은식은 '명문거족 가운데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했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6형제 중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단 한 사람

조선왕조가 망한 1910년 말에 형제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45년 11월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올 때까지 이시영선생의 삶과 발자취는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일제의 강점기는 그대로 선생이 일제와 맞서 싸운 역사였고, 선생의 삶은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천성이 강직하여 일제에 분연히 맞서 싸웠지만, 독립운동 기간 중 어느 순간에도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내세우지 않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때로는 격렬한 투쟁의 현장이나 해방된 조국의 좌우 갈등의 길목에서도 조용히 민족주의 노선을 지킨 인물이었다.

'성재 이시영(1869~1953)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문관이 돈을 탐하지 않고, 무관이 죽기를 싫어하지 않으면 가히 천하를 회복할 수 있다' -임시정부 때 이권으로 생각들이 갈라져 있음을 애통하시며 하신 말씀-

강북구에서 세워놓은 어록 안내판에 쓰여 있는 글이다.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초대 부통령을 지내고 2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53년에 서거했으며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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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영웅 #성재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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