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안에서 쓰러진 대통령의 꿈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8.06. 00:00

수정일 2012.08.06. 00:00

조회 2,585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못살겠다. 갈아보자~"

"그래 맞는 말이야. 이번엔 바꿔야 돼. 신익희 선생으로…."

1956년 5월, 온 나라가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로 들썩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선거 슬로건은 당시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정서에 정말 딱 맞는 말이었다. 선거민심이 술렁이고 있었다. 서울의 한강 백사장과 지방의 넓은 운동장에서 열린 선거유세는 군중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당시 집권여당인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이었고, 야당에서는 민주당의 신익희와 진보당의 조봉암이 출마했다.

이틀 전인 5월 3일, 신익희의 한강백사장 유세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열렬한 박수와 함성으로 그를 지지했다. 군중들의 열띤 지지에 고무된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지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남지역 유세를 하기 위해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는 너무 허망하게 운명했다. 호남선 이리역(지금의 익산) 도착 30여 분 전이었다. 사인은 뇌일혈과 심장마비로 판명되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전환점이 될 뻔했던 국민적인 열망이 물거품처럼 스러져버린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 비운의 주인공이자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항일애국선열인 신익희 선생. 정치인이며 교육자의 삶을 살았던 그의 묘역을 북한산 자락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 입구 근처 둘레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하우스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왼편에 '해공 신익희 선생 묘소입구'라고 쓴 한문자 표지석이 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4․19혁명 사적비'가 나타난다. 붉은색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몇 개의 계단 위에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무덤 앞에는 '해공평산신익희지묘'라 쓴 묘비와 함께 망주석과 문인석, 그리고 장명등(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이 서 있다. 마침 입구 계단에 앉아 쉬고 있던 80대 초반의 노부부는 옛날부터 해공 선생을 존경했다고 한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노부부에게서 해공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한말 명문가에서 출생한 해공선생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가였던 해공 신익희 선생은 1892년(1894년 출생설도 있음) 6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이며 자헌대부 장례원경을 지낸 신단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명문가로 신판서 댁으로 통했다.

그는 유년기에 둘째 이복형인 신규희로부터 천자문, 명심보감 등 한학을 배웠으며 1905년에 인근 남한산성에 있는 소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음에도 유복한 가정환경 덕에 어렵지 않게 생활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경성의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진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고, 1911년 참판을 지낸 이명재의 딸 이승희와 결혼하여 딸 신정완과 아들 신하균을 얻었다.

결혼 후 그는 신혼의 단꿈에서 깨기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가 장덕수를 만난다. 1917년에 귀국한 이후에는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에서 법학 교수와 재무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을 가르쳤다.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1919년 김시학,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황해를 건너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오른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9호에 설립된 독립정부 임시사무소를 찾아간다. 그때가 1919년 3월 19일이었다. 4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한 그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신석우, 조동호, 신규식, 선우혁, 한진교 등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에 참석했다.

그해 4월 의정원이 설치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법무총장을 거쳐 1920년 9월에는 임정 외무총장이 되었고, 내무차장, 외무차장, 문교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빠졌을 때는 난징으로 건너가 일본유학 시절에 만난 중국 국민당군 육군대장 호경익 장군을 찾아간다. 그때 호경익은 신익희를 중국군 육군 중장으로 추천하고, 후에 그는 남경정부 심계원 고문으로 위촉된다.

호경익과 신익희는 한중 연합 게릴라 부대 편성을 추진한다. 호경익 부대의 사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던 신익희는 한국 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분용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한국독립에 동조하는 중국청년들 600명과 러시아 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특수부대를 편성했다. 그때 군자금으로 기탁 받은 1천 원을 상하이 임시정부 측에 군자금으로 지원했다.

국민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던 해공은 중국 땅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임정요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안타까움 속에 해공은 1945년 12월 3일 서해를 건너 군산비행장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돌아온 조국의 해방정국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좌우 이념대립과 미군정과의 갈등, 그리고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지도자들의 이합집산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립하자 그는 협상의 불가함을 들어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한편 그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을 영입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귀국 직후부터 자금을 모아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46년 9월 미군정청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전신)을 설립한다. 해공은 지금의 국민대학교 설립자이자 이사장 겸 초대 학장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정식 정계진출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같은 해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이었던 이승만이 대통령에 피선되자 8월 4일 국회 부의장에서 국회의장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조국의 광복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와 아들

1952년 제2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은 결국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들의 높은 열망과 지지를 받는다. 당시 민주당의 선거 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는데 국민적인 열풍으로 어린이들에게서도 스스럼없이 들을 수 있는 구호였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호남선 열차 안에서 아까운 생을 마쳤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역 아래 왼편 오솔길 옆에는 아들 신하균의 묘가 있다. 신하균 역시 부친처럼 중국에서 광복군사령부 정위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조국에 돌아와 정치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해공 신익희 선생 부자는 중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묘역 안내판에는 '평산 신하균(1915.9.2~1875.11.10) 모친과 함께 상해로 신익희 선생을 찾아가 공부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 광복군사령부 참모회에 근무하면서 대적 공작과 독립운동에 힘썼음. 제3,5,6대 국회의원 지냄. 민정당 경기지구당위원장, 민중당 정치훈련원장 역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라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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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신익희 #신하균 #애국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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