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검사가 누군지 아세요?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8.02. 00:00

수정일 2012.08.02. 00:00

조회 6,566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격변기였던 구한말과 일제의 식민통치기간, 그리고 해방정국, 6·25 한국전쟁 등 민족적 시련기에 독립운동가 또는 교육, 정치가로 조국의 해방과 민주국가 건설 및 수호에 앞장섰던 선각자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잠들어 있을까? 이 칼럼은 서울의 둘레길을 걷다 만난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영웅들 이야기다.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수유리 북한산 둘레길, 일성 이준 열사 묘역 입구 어록 표지석에서 구한말인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밀사로 참가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해 순국한 이준 열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글이다.

당시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의 열강들에게 알리려 했던 열사의 뜻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죽음으로 호소한 열사의 연설문은 세계 유수의 언론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서둘러 이준 열사가 병사했다고 왜곡했지만 열사의 순국은 울분을 참지 못해 할복 자결했다는 소문이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글거리는 태양빛과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북한산 둘레길을 찾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입구에서 오른편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면 첫 번째로 만나는 묘역이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두 번째 만나는 분이 일성 이준 열사지만 해공 선생보다 한 세대 앞에 사셨던 분이어서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삼복더위 속에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고종황제의 밀사

일성 이준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세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모두 전염병으로 작고하여 조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 17세 때 고향을 떠나 상경한 그는 약관의 나이에 위기에 처한 국가를 걱정하며 정객들과 접촉하던 중 대원군을 만나게 되었다. 대원군은 열사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당시 형조판서였던 김병시에게 소개했다.

김병시 대감도 열사의 영민함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탁견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저에서 수학토록 배려하고 도움을 주었다. 열사는 26세 때인 1884년에 함경도시에 장원급제했다. 그리고 30세 때인 1888년 고향인 북청에 인재양성을 위한 경학원(북청공립농업학교 전신)을 설립했다.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선구자적인 발상이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 1기생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우리나라 검사 1호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당시 만연되어 있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 고위층의 압력을 단호하게 배격하면서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했던 그는 결국 모함을 받아 33일 만에 검사직에서 면직 당하고 말았다.

검사 한 명의 노력으로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백성들을 위해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후 서재필, 박영효, 이상재 등과 함께 부정하고 악질적인 관료들을 규탄하는 한편,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저항운동에 앞장섰다. 이 저항운동이 바로 우리나라 민주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모함으로 33일 만에 면직 당한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어 민족의식고취와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일제의 핍박이 강화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그리고 40세 때인 1898년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열사는 비정탄핵 가두연설로 이승만, 이동녕 등 17인과 함께 투옥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했지만 그의 민족의식과 항일투쟁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04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대한협동회'를 만들어 집요한 투쟁 끝에 결국 일본공사로부터 황무지 개간권을 환수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1906년에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 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 이갑, 안창호, 유근, 유정수, 홍재기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오성학교를 설립했으며, 광신중상업고등학교도 설립했다.

또한 법안연구회를 조직하여 법률제정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시켜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헌법을 속히 실행하여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에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했다. 한편 열사는 당시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국가에 꼭 필요한 인재를 등용토록 촉구하는 '인재등용론' 제안서를 보내어 법조계와 일반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드디어 1907년,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소지하고 헤이그로 향한다.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부당한 조약으로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만주에 있던 이상설, 러시아에 있던 이위종 등과 합류한 열사 일행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두 달여 만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과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의장국인 러시아는 약소국인 대한제국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열사 일행이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부당함을 알리려 했던 대한제국의 계획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회의장 밖에서 각국 언론인들을 상대로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다. 얼마 후인 7월 14일 이준 열사는 헤이그의 숙소인 데용(De Jong) 호텔에서 객사했다.

이준 열사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자결설, 병사설(일제의 통감부 주장)과 함께 분사설(분에 못 이겨 죽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직접적 사인은 확실치 않으나 '분사'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열사의 사후 악랄한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이미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했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시립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사후 56년이 되던 해인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북한산 자락인 현 위치에 안장되었다. 묘역 안에 들어서면 이준 열사의 흉상부조가 부착된 벽체 중앙 바로 앞쪽 아래에 태극기가 새겨진 석판이 놓여 있는데 열사의 시신은 바로 그 석판 밑에 안치되어 있다.

벽체 오른 편 끝에는 열사의 부인인 이일정 씨의 자그마한 묘비가 서 있고, 왼편 벽체에는 고종황제가 세 사람의 밀사들에게 내린 신임장이 새겨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이준 열사 위훈비, 홍살문과 함께 '자유수호의 상'이 서있으며,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 좌우에는 열사의 어록비 세 개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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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이준열사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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