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동상 무사귀환 미션 성공!

시민기자 이상무

발행일 2010.12.23. 00:00

수정일 2015.12.18. 15:26

조회 5,845

12월 23일, 해가 뜨기 전 7시 정각에 이순신장군 동상이 광화문광장에 다시 세워졌다. 그동안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주물공장에서 40일 간의동상 수리 작업을 마치고 12일 밤 10시에 출발하여 13일 새벽 2시에 광화문광장에 도착한다고 하여 시민기자는 현장을 가보았다.

무게 8t, 높이 6.5m, 폭 3m에 이르는 거대한 이순신장군 동상을 운반하기 위해 길이 16.7m, 적재적량 17t의 특수 차량인 ‘로베드 트레일러' 무진동 차량과 대형 트레일러 등 각종 중장비가 동원되었다. 무진동차량은 동상을 눕힌 형태로 싣고 운반거리 110km를 평균 시속 30~40km로 공장에서 이천시 → 3번국도 → 곤지암 → 광주시 → 하남시 →팔당대교 남단→ 올림픽대로 → 올림픽대교 → 강변북로 → 한강로를 거쳐 왔다. 승용차로 1시간 거리지만 우회도로를 이용하여 4시간이 걸렸다.

지난 11월 14일 42년 만에 보수를 위해 공장에 도착한 이순신장군 동상은 15일부터 작업을 시작, 먼저 고압으로 모래를 쏘는 샌딩 작업으로 외부의 칠을 벗겨낸 후 주물상태가 좋지 않고 균열되었거나 구멍난 22군데를 확인해 새롭게 용접하고 갈색 바탕 암녹색 색상을 입히고 코팅한 후 16일 자문회의를 통해 최종 점검을 받았다.

보수업체인 박상규 공간미술(www.건축조형물.kr) 대표는 “동상을 상단에 자리 잡는 일이 제일 힘든 공정”이라고 하면서 이천공장에서 출발하기 전에 무사고를 기원하면서 고사까지 지냈고,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생긴 모습은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같이 생겼는데 주물 솜씨는 제일인 것 같다. 이번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 프로젝트에는 35명 전 직원이 총 동원되었다고 한다.

조각가이기도 한 유재흥(43) 감리사는 “기존에 용접했던 부위들을 재 용접하는데 판끼리 두께가 균일해야 하는데 두꺼운 곳과 얇은 곳이 있어 시간이 걸렸고 노련한 기술자들도 힘들어했다”고 하면서 모래로 샌딩하고 보니 당초에 진단했던 훼손상태보다 더 많은 결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문회의에서는 이순신장군 동상을 제작한 고(故) 김세중씨의 부인인 시인 김남조씨도 참석하여 보수한 동상이 원형대로 잘 복원되었다고 했다. 동상 만드는 주물 기술이 일본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성분을 배합하는 기술은 조금 뒤떨어진다는 우려는 기우인 것 같았다. 이번에 새로 보수한 동상은 반영구적으로 수백 년을 갈 수 있다고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의 박상희 주무관은 “이번 보수에 들어간 예산은 3억 1700만원”이라고 하였다.

이 충무공 동상 재설치를 위해 20일~21일 이틀간은 동상 제자리 설치를 위한 기단부와 하단부를 평평하게 하는 작업과 동상을 받칠 통석작업을 미리 했고, 23일 작업을 위해 200t 크레인 1대ㆍ20t 로브이 1대ㆍ50t 크레인 1대ㆍ스카이차 2대가 동원되었다. 현장은 마치 거대한 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무사귀환' 생생 일지

오전 1시,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에서 시청 방향 3차선 도로의 교통이 통제되었다. 50t크레인1대와 스카이차1대가 동원 되어 거북선과 좌ㆍ우측 북을 설치하였다.

오전 2시, 경찰 차량안내로 동상을 실은 트레일러가 예정 시간대로 남대문 방면에서 나타났다. 몸체가 커서 커브 길은 한 번에 돌지 못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진입하였다. 동상을 들어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고 크레인으로 누워있던 동상을 바로 세우고 26m길이의 팔로 동상을 들어 올린 다음 10.5m 높이의 기단을 향해 서서히 회전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동상이 기단 위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동하였다. 보기만 하여도 아슬아슬하였다.

오전 3시, 동상 안착 작업이 끝났다. 어떤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볼트로 동상을 고정하고 용접작업을 1시간 넘게 하였다. 이번 공사 중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한다.

오전 4시, 측량을 계속하면서 무전기로 동상에서 작업하는 사람과 연락한다. 동상 자리 잡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보니 영상1도였으나 겨울 밤 공기는 찼다. 프로의식을 가진 기자들이 밤을 세며 동상이 세워지는 모습을 취재하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 밤 야식으로 햄버거와 따뜻한 커피가 나와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시민들은 별로 안보이고 많은 언론사가 취재경쟁을 벌였다.

오전 5시, 낙뢰를 대비해 동상 머리 한가운데 피뢰침이 설치되었다. 이것을 중심으로 동상 전체의 균형을 잡으면서 제자리를 잡았다.

오전 6시, 크레인 차들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고 통제되었던 길도 열려 차량도 점차 많아졌다. 스카이차 2대가 동상 보호막을 걷기 위해 사다리가 올라갔다. 동상 보호막은 얇은 스티로폼과 비닐 덮개로 싸여 있었다.

오전 7시, 정시에 보호막이 탈피하면서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이 충무공 모습이 드러났다. 기단 높이 10.5m과 동상 높이 6.5m를 감안하면 총 높이는 17m나 된다. 제작 당시 고 박정희대통령이 일본인들이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는 지시와 노산 이은상ㆍ월탄 박종화ㆍ팔봉 김기진 원로의 의견을 듣고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의 고증을 받고 제작하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여기저기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느라 분주했다. 동지를 갓 지난 날이라 7시가 넘어도 해님이 아직 안 나왔지만 하늘은 맑고 안개가 조금 깔려 있었다. 기온은 0도 정도로 쌀쌀하였다.

★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충무공 동상 칼집 시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를 비우자 이 기회에 동상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은 예전에도 있어 왔다. 당시 동상제작을 주관하였던 서울신문사에는 이와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다. 바로 2004년 7월 1일 발간한 ‘서울신문 100년사 ’. 이 책에 고증위원과 제작자 고(故) 김교수의 의견이 나와 있어 내용을 요약하였다.

문) 건립 당시에도 오른 손에 칼집을 잡고 있어 항복하는 장군 같다는 의견에 대하여

답) 고증위원 이숭녕 교수는 “일본의 사무라이 전투를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실이나 예가 어떤 문헌에도 없다”고 설명했고 고증위원 유홍렬 교수는 “장군이 쥐고 있는 칼은 전투용이 아니고 지휘용이다. 장군으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지휘용 장검을 반드시 왼손에 잡을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문) 전고가 누워있어 이상하다는 의견에 대하여

답) 제작자 김 교수는 “북을 세워놓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조각의 구조 상 뉘어 놓아야 안정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답했다.

문) 표준 영정과 동상의 얼굴이 다르다는 문제에 대하여

답) 제작자 김 교수는 "동상 제작 연도가 표준 영정 결정 연도보다 앞섰기 때문에 시빗거리로 삼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고, 덧붙여 역사상 인물을 특정화 모양으로 정형화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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