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월광풍, 도봉산 각석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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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07.21. 00:00
시민기자 이혁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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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을 처음 오르는 사람은 몰라도 웬만한 산 마니아라면 계곡에 즐비한 바위글씨 한두 개쯤은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비록 뜻은 제대로 새길 수 없어도 바위글씨는 자연의 일부인양 친근하다. 너럭바위 비슷한 곳에 어김없이 새겨진 명필들의 글씨는 모두 한문으로 쓰여 난해하지만 어딘가 자주 본 글씨체는 그리 어색하지 않다. 바위에 새긴 글씨를 각석(刻石)이라고 하는데 도봉산 계곡에는 각석들이 유난히 많이 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있을 때면 가끔 도봉산을 찾지만 내심 도봉서원과 서원을 배경으로 벌어진 역사와 문화에 더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각석들은 언젠가 문화재로 지정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도봉서원 주변의 11개의 바위글씨가 일괄 서울시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다. 각석군(刻石群)이 비로소 문화재로 승격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예우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그전에 틈을 내 여유롭게 각석군을 음미하기로 했다. 이번 답사기는 어쩌면 지정되기 전 마지막 탐방기가 될지 모르겠다. 각석군을 살필 때 도봉서원을 먼저 이해해야 할 듯 싶다. 각석을 한 주인공들이 대부분 도봉서원과 밀접한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도봉서원은 조선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대표적인 사액서원이다. 임금의 친필로 현판을 달았을 만큼 서원을 찾았던 유생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도 대단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서원은 학문연마의 도장이었지만 성리학을 두고 학파와 권세를 집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도봉서원은 송시열의 일대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서인세력의 총본산이었다. 따라서 각석들은 서원 유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추억하거나 그들의 학문적 이상을 바위 곳곳에 새긴 흔적이자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지난주 산을 오르며 각석들을 찾아봤다. 도봉산 입구 안내소를 지나 얼마 안 가면 제일 먼저 도봉동문(道峰洞門)이라는 바위글씨가 있다. '여기가 도봉동 입구'라는 뜻인데 송시열이 쓴 힘 있는 해서체다. 우암 송시열만큼 도봉산을 예찬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여러 각석을 남겼으니 말이다. 도봉동문 바로 옆 '북한산국립공원'이라 쓴 큰 입석은 우암 글씨체에 비하면 한참 치기스럽다. 여기서 조금 계곡을 따라 오르면 제일동천(第一洞天)과 필동암(必東岩), 춘주담(春珠潭), 만석대(萬石臺), 연단굴(鍊丹窟)이라 쓴 바위글씨들이 있는데 경계와 위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통제구역 내에 있어 안내도우미의 양해를 구해 확인했다.) 조금 오르면 오른쪽 도봉서원 앞 계곡 주변에 각석들이 또 한데 모여 있다. 이곳 풍광이 서원 터를 배경으로 무척 수려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원 건너편 계곡 바위에는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 화양노부서(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가 새겨져 있다. 이곳의 경치를 노래한 싯귀로 이 또한 송시열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뜻을 풀이하면 "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히 이어받았도다.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인데 화양노부는 송시열 자신의 호칭이다. 그 옆에 '무우대 한수옹(舞雩臺 寒水翁)'이라 쓴 다른 글씨체가 있다. 한수옹은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이다. 그는 스승의 글귀 옆에 조그맣게 자신의 글씨를 새겨 넣어 스승을 향한 존경심을 표현했다고 전한다. 또 조금 위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라 새긴 바위글씨가 있다. 그런데 이 바위는 반쯤 물에 잠겨 물속의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마 바위가 급류에 휩쓸려 구르다 기운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반듯하게 세울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의 저 자세가 되레 풍치 있게 보인다.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시경의 글귀를 새겼는데 이는 “높은 산처럼 우러러본다”는 말로 조광조를 존경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복호동천(伏虎洞天)은 엎드린 호랑이가 사는 곳처럼 심산유곡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동천은 ‘신선들이 노는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글쓴이의 함자가 안 보인다. 추측컨대 도봉서원에 수학했던 한 유생이 도봉산의 절경을 노래했을 것이다. 각석군을 간단히 살폈지만 바위에 새긴 심오한 뜻을 범인(凡人)의 생각으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무릉도원에 비교될 정도로 경치가 수려한 도봉산 계곡에서 멋과 풍류를 즐긴 행위로 추측할 뿐이다. 각석은 도봉서원 창건(1573년) 후 18세기 초까지 집중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대부분 성리학의 대가들인 점이 특색이다. 그러므로 일부 미상의 글씨가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각석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용되지 않는 일탈행위지만 당시에는 풍광을 더하는 예술적 행위로까지 여겼던 걸 보면 새삼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과거에는 도봉서원과 각석군을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경관으로 바라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바위와 어울린 도봉산 계곡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비가 적당히 내려 풍부한 수량과 낭랑한 물소리는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 옛날 도봉서원 선비들도 우리와 똑같이 발 담그고 노래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각석을 예술로 승화시켜 영원히 도봉산의 빼어난 경치를 공유하길 바랐을 것이다. 이제 그런 뜻이 문화재로 거듭나며 현실이 되고 있다. 하지만 각석에 지금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도봉산 자연환경 안내도우미 조명우(32) 씨의 말마따나 각석군이 이제 값진 문화유산이 됐기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도봉산 계곡을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지만 각석이 있는 계곡 일부에 대해서는 종전과 같이 통제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앞으로 일반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각석에 대한 안내와 설명은 예전보다 강화될 것이다. 각석에 새긴 글귀 중에는 ‘제월광풍'이 유독 많다. 그 당시 유행처럼 선비들이 좋아했던 글귀 같다. 덥고 지루한 요즈음, '비 개고 달 뜨고 시원한 바람 부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릉도원이 아닐까. '제월광풍', 바위에 새긴 예술혼을 산을 내려오며 혼자 읊조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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