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환국 74주년 특별전, 11월에 온 비행기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19.11.26. 12:52

수정일 2019.11.26. 14:09

조회 1,680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찟기워도 찟긴 몸 이 연안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 

1945년 8월 18일 새벽 중국 시안(西安)비행장에서 미군 최신예 수송기 C-47기 1대가 이륙했다. 목적지는 경성의 여의도비행장. 그곳엔 아직 일본 군대와 탱크 등이 남아 있는 상태라 어떤 돌발상황이 전개될 지 모르는 위험 지역이었다. 비행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가 미CIA의 전신인 OSS 부대원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위 글은 그중 이범석 장군이 C-47비행기가 서해바다 위를 날고 있을 때 쓴 것이다. 그들 머리 속에 그리는 되찾은 조국은 해방의 기쁨으로 만세소리 우렁차고 환영객이 여의도를 메울 만큼 열기 가득찬 푸른하늘의 대한민국이었으리라!

C-47 수송기앞에서 광복군과 미군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C-47 앞에서 광복군과 미군들이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는 사진

오후 2시 28분 C-47 비행기는 경성비행장(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들이 내리자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고국의 환영인파가 아니라 착검을 한 일본군이었다. 일본도를 뽑아 든 대열도 있었고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왔다. 항복한 일본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1945년 8월 10일) 하였으나 주전파의 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8월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8월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했다. 8월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했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병력도 철수했다. 이 기간 동안 치안은 공백 상태였다. 일본은 한국인의 봉기를 우려해 치안권을 강화했고 미군은 연합군 포로접견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C-47비행기에서 김구주석이 내리는 애니메이션중 한 컷

C-47 비행기에서 김구 주석이 내리는 애니메이션 장면

미군·광복군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탱크 2대를 끌고 나와 활주로에 박격포를 배치했다. 정진대원들도 토미건 기관단총의 자물쇠를 풀어 일전을 벌이려 했으나 단장 버드중령이 이를 말렸다. 양측 긴장이 누그러진 그날 밤 일본군이 광복군에게 항복의 예를 취해 주는 술을 받아 마신 후 이튿날 새벽 5시 다시 C-47기는 기수를 돌려 중국 산동성으로 향했다.

다시 석달 후인 1945년 11월 23일 새벽 1시 상하이 강만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 주석의 주선으로 주한 미국사령관 하지 중장이 보내준 C-47기가 서울로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 15명의 임시정부 요인이 타고 있었다. 석 전의 회항사건을 알고 있기도 했지만 임시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던 터라 3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서로 말 한마디 없었다. 공항 도착 직후 장준하가 <돌베개>에 기록한 글이다.

광복군 정진대원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가 비행기착륙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복군 정진대원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가 비행기착륙 지점에서 기념촬영한 사진 

‘시야에 들어 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GI (미군병사) 몇명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 벼렸다. (중략)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중략) 나부끼는 국기, 환영인파,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당시 상황을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육성으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했다. 토크패널인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청년위원장 이민예 학생과의 대담도 이어졌다. 답변형식을 통해 당시 현장을 보는 듯하게 실감나게 이야기했고 비행기 앞쪽에 설치된 모니터에 당시 기록사진도 중간 중간 투사되었다. 1945년 8월 18일 이곳에 착륙했다가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 3개월 후 11월 23일 당시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 했던 배경, 미국 등 강대국들의 정세, 천황은 항복했으나 국내 일본군의 서슬퍼런 치안강화, 미군포로를 서울 등 3개소에 분산 수용하여 미군폭격을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 긴장하며 숨죽이고 들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황량한 김포비행장 환국의 순간, 환영객 한 명 없던 쓸쓸했던 상황, 태극기도 흔들 수 없었던 상황을 서해성 총감독은 생생한 스토리텔링으로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서해성총감독이 패널토크쇼를 진행하고 있다. 옆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배다리선생님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행사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패널 토크쇼를 진행 중인 모습(우). 애니메이션 제작자 배다리 씨(좌) ⓒ조시승

이어 그날을 기리는 애니메이션이 비행기 앞 스크린을 장식했다. 제목은 ‘11월에 온 비행기’. 한 소년이 등장한다. 미군의 구두닦이와 막사정리를 하며 미군들이 주는 팁으로 생활하는 하우스보이다. 그런 생활을 하던 날인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 소년에게 낯선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쁘게 미군들이 움직였다. 뭔가 긴장된 듯 보였다. 수송기가 상하이에서 이곳으로 도착한다고 했다. 곧 C-47수송기 한대가 활주로에 멈춰섰다. 맨 먼저 중절모를 쓴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바로 활주로로 내려오지 않고 잠시 사방을 둘러 보았다. 비행장에는 미군들 밖에 없었으나 그는 마중나온 사람들을 찾는지... "27년만에 밟아보는 조국 땅이로군!" 오랫만에 듣던 그리운 한국말을 소년은 들었다. 뒤에서 "이시영선생님 그 아이가 유일한 환영객입니다"라는 소리도 있고 "김구 주석님 일단 서울시내로 들어가서 회의를 열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정부 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라고 할 때부터 예상되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광복한게 8월인데 11월말에야 비행기를 보냈으니 이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고도 남지않겠는지요?" 실망과 분노표출이 이어졌다.

품 속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려 하자 미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장준하를 이시영 선생이 달래고 있는 애니메이션 장면

품 속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려 하자 미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장준하를 이시영 선생이 달래고 있는 애니메이션 장면 

이내 미군들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프차에 나누어 태웠다. 차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안경을 쓴 군복 입은 청년이 품에서 태극기를 끄집어 내 흔들려고 할 때 미군 서전이 잔뜩 사나운 목소리로 그걸 멈추고 치우라고 제지했다. 한 순간 소년의 가슴에 불이 이는 듯 한 분노가 올라왔다.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아 서울시내에서 우리나라 태극기를 흔들지 못하게 하는 걸 보고 소년은 그 청년과 함께 뜨거운 설움이 치밀었다. 이를 목격한 이시영 선생이 그 청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준하군 앞으로 죽을 때 까지 자손만대까지 태극기를 맘껏 흔들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세. 오늘은 참으세!’

C-47기에서 내려 임정요인들이 환국하는 모습을 서해성총감독이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민예 청년위원장

C-47기에서 내려 임정요인들이 환국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서해성 총감독(좌)과 이민예 청년위원장(우) ⓒ조시승

소년은 그 군복청년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미군 서전이 밀어내었다. 이윽고 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서울 방향으로 출발했다. 나는 보았어. 그 날을... 유일한 환영객이었던 소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을 기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며 가슴에 새긴다... 74년 전 이곳 여의도 ‘11월에 온 비행기’는 ‘그 구두닦이 소년의 다짐을 우리가 지금 잘 새기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 70주년 기념식에서 새로 단장한 C-47 주위를 공군의장대가 도열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 70주년을 맞아 새로 단장한 C-47기 주변을 공군의장대가 도열하고 있는 사진 

서울시는 11월 2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여의도 공원에 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공간인 C-47 비행기 전시관에서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74주년 특별전, 11월에 온 비행기’를 개최한다. C-47 비행기 전시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공간이다.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정진대원들이 미국 전략첩보국(OSS) 요원들과 함께 C-47기에 탑승, 착륙했던 경성비행장이 이곳 여의도공원 C-47 비행기 전시관이다.

오는 11월 30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시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시민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역사적인 비행기 안에서 애니메이션 상영을 보며 당시를 회상할 수 있다. 온 가족이 함께 보고 배우며 애국심 고취로 이어질 수 있는 있는 좋은 기회다.

참고:  C-47 수송기는 1940년에 제작되어 41년부터 실전에 배치된 미국의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 세계2차대전,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 전 세계를 누빈 이력에 맞게 ‘Skytrain(스카이트레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군용기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 북한에 의해 국내 대부분의 공항이 점령 당한 상황에서 당시 주력이던 4발 엔진 C-54 Skymaster(스카이마스터)의 운용이 어려워지자 C-47기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낙동강 방어선을 치열하게 방어하던 미보병 제24사단 등에게 보급품 등 물자를 공급하고 부상병을 일본으로 후송하는 등 역할을 충분히 해낸 당시 최고의 수송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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