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아래 스릴 넘치는 역사의 물결이 흐르네

정명섭 정명섭

Visit479 Date2019.02.11 15:51

느지막한 오후 세검정 모습

느지막한 오후 세검정 모습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4) 세검정

경복궁 뒤쪽 창의문 고갯길을 지나면 서울이면서 서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건물이나 사람들이 낯선 것이 아니라 옛날 한양의 경계인 창의문을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버스도 올라가기 어려운 언덕길을 지나 내리막길을 간다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내리막길을 따라 가면 석파정이 있고, 백사실 계곡이 나온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을 상징하는 세검정과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영조 때 지어진 정자로 바로 옆에 흐르는 하천을 굽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북한산과 인왕산을 모두 바라 볼 수 있다. 한양과 가까운데다가 풍광이 아름다워서 그런지 많은 사연과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먼저 세검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인조반정 당시 이귀와 김류 같은 주동자들이 이곳에 모여 바위에 칼을 갈고, 물로 씻어내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은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창의문을 돌파해서 한양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정자가 훨씬 나중에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정자가 있었든지, 아니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세검정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 중에는 실학자로 유명한 정약용도 있었다. 그는 아예 세검정에서 즐겁게 놀았다는 짧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정약용은 특히 비가 올 때 세검정에 가는 걸 즐겼는데 바로 옆에 홍제천으로 이어지는 하천이 거센 급류로 변해버린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한양에서 술을 마시다가 비가 올 조짐이 보이면 급히 세검정으로 달려갔는데 흐르는 물에 떠밀려온 돌과 나무에 세검정의 초석과 난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스릴을 만끽했다.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는 암석 위에 세워져있는 세검정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는 암석 위에 세워져있는 세검정

다른 기록에도 한양 사람들이 비가 오면 구경을 왔다고 하니, 물구경은 불구경 다음으로 흥미진진했던 게 분명하다. 세검정은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는 암석 위에 세워져있다. 그래서 이 암석에 실록의 원본에 해당되는 사초가 적힌 종이를 씻어서 말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온갖 이야기를 듣고 부푼 꿈을 안고 간다면 나처럼 크게 실망할 것이다. 바로 옆에 차들이 쌩쌩 다니는 도로가 있고, 하천은 바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하천 주변이 콘크리트로 덧대어져 있어서 정약용이 스릴을 만끽하던 느낌이 하나도 살지 않는다. 하지만 느지막한 오후에 이곳에 오면 산과 산 사이로 저물어가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아마 이 시대에 정약용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장쾌한 또 한편의 이야기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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