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궁궐 속 작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었을까?

정명섭 정명섭

Visit379 Date2018.10.29 16:04

경복궁 집옥재

경복궁 집옥재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10) 경복궁 속 작은 도서관 ‘집옥재’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경복궁은 숨겨진 보물들이 많은 곳이다. 비록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지만 경회루만큼 아름다운 향원정과 을묘왜변의 비극이 서려있는 건청궁, 그리고 북쪽 끝에 자리 잡아서 늘 한적한 집옥재가 바로 그곳이다.

집옥재는 경복궁 안의 다른 전각들과는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이 간다. 옥을 모으는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원래는 창덕궁의 함녕전 근처에 있다가 1891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고종의 거처가 경복궁으로 바뀌면서 함께 이사를 온 것이다. 건물은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벽돌을 사용했고, 용마루에는 중국풍의 용 두 마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우측의 협길당은 전통적인 한옥 형태지만 좌측에 있는 팔우정 역시 유리창을 사용했다.

현판의 집옥재라는 글씨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적혀있다. 건물에 칠해진 단청은 궁궐임을 감안해도 굉장히 화려한 편인데 특히 내부의 지붕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정 가운데에 팔각형으로 솟은 공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청나라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고종은 이곳을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했으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후원 가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골치 아픈 일에 시달렸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용도는 왕실의 도서관이었는데 서구의 각종 문물과 기술을 소개하는 책들을 비치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구화를 진행하려던 고종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집옥재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벽돌과 유리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와 한옥이 만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옥은 지붕이 무겁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기둥이 두껍고 많아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집옥재는 벽돌을 사용한 덕분에 기둥의 숫자도 줄어서 공간을 더 넓게 사용할 수 있었다. 팔우정에 달아놓은 유리창은 기존의 종이로 된 창호보다 채광과 보온 효과가 월등했다. 궁궐의 가장 깊은 곳, 임금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공간에서 조차 청나라와 서구의 영향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옥재는 오래지 않아서 버려졌다. 을묘왜변을 겪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감행하면서 경복궁을 탈출했고, 덕수궁으로 환궁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지나고 광복이 된 이후에도 이 일대는 청와대를 경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1996년에 접근 금지조치가 해제된 이후에야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리고 임금이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탈바꿈해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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