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걸어본 ‘고종의 길’…결코 짧지 않은 120미터

정명섭

Visit1,133 Date2018.08.27 17:06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지난 8월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 고종의 길

‘길’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 등이 다닐 수 있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한다. 길을 통해 사람들과 상품들이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이 전파된다. 그 밖에도 길은 누가 언제 걸었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따라서 기억되거나 되살아나기도 한다.

서울시가 8월에 한시적으로 개방한 ‘고종의 길’이 그렇다. 이 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걸었던 길이다. 그리고 고종이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정세와 일본의 야심 때문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종은 개인적으로도 큰 아픔을 겪었는데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부인인 명성왕후를 시해한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다음해인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아관파천이라고 불린다.

1년의 피신 기간이 끝나고 고종은 환궁을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하지만 고종이 돌아간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당시에는 경운궁으로 불린 덕수궁이었다. 고종에게 경복궁은 너무 커서 지키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내가 피살되었다는 고통의 장소였다. 반면 덕수궁은 주변인 정동 일대에 외국 공사관과 학교, 교회 등이 밀집해 있어서 일본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덕수궁과 정동은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탑만 남아 있지만 당시 러시아공사관 ⓒ 조시승

탑만 남아 있는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탑 밖에 남지 않은 구 러시아 공사관은 덕수궁의 선원전과 붙어있었고, 작은 길이 중간에 있었다. 선원전은 임금의 어전과 신주를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의 신문로를 가로질러 경희궁과 연결된 홍교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길 중간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의 본관 뒤편에는 비밀 통로가 난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아마 고종의 길 중간에 난 문과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종의 길은 경희궁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일본의 위협이 있을 경우 러시아 공사관으로 빨리 피신하기 위한 비상통로이기도 하다.

덕수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일본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던 고종의 측은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래서 고종의 길은 곧 대한제국과 우리의 아픔을 상징하기도 한다. 일본에 국권을 잃은 이후 덕수궁의 영역은 급격하게 축소된다. 선원전이 없어지면서 고종의 길 역시 미국 공사관 영역에 포함되어버린 것이다. 광복과 전쟁을 겪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종의 길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다 2011년이 되어서야 겨우 돌아오게 되었고, 복원 과정을 거쳐 올해 8월에 임시 개방되었다. 길옆에는 일제강점기 때 지은 조선중앙저축은행 중역의 사택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남아있다.

고종의 길은 120미터로 생각보다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이 고종의 길이 걸어온 역사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며칠 안 남았지만 꼭 가보기를 권한다. 8월이 끝나면 다시 길을 폐쇄하고 한 달간의 복원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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