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고종의 길’ 걸어봤어요~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18.08.21. 13:46

수정일 2018.08.21. 13:46

조회 3,743

122년 만에 열린 고종의 길(King’s road), 이 길을 통해 고종은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을 한다.

122년 만에 열린 고종의 길, 이 길을 통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을 한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여명이 밝아 오기 전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은 경복궁에서 궁녀로 변장한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올랐다. 또 하나의 가마에는 엄상궁(영친왕의 생모)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탄 이들 일행은 경복궁 영추문을 바람같이 빠져 나와 미리 연락하여 준비하고 있던 러시아 공관(아관)으로의 탈출에 성공한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어떻게 서릿발 같은 일제감시망을 피해 탈출할 수 있었을까?

엄상궁은 두 채의 가마로 궁을 상시 드나들며 일제의 살벌한 감시를 누그러뜨렸다. 최대의 볼모였던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했고 조선을 두고 강대국들이 벌이던 치열한 쟁탈전에서 고종을 품은 러시아와 미국이 힘을 갖게 된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말임에도 많은 관람객이 ‘고종의 길’을 찾고 있다.

주말임에도 많은 관람객이 ‘고종의 길’을 찾고 있다.

아관파천의 길 중 이번에 복원된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앞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좁은 길이다.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의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 122년 만에 열린 것이다. 8월 한 달간은 시범 공개 기간이며, 정식 개방은 10월이다.

복원 공사가 시작되기 전엔 물탱크가 놓여있는 120m 오솔길에 불과했던 길이었다. 남아있는 담장과 당시 영국공사관에서 찍은 사진 등을 토대로 2년간의 공사로 복원이 완료됐다. 이 길의 이름은 대한제국기 미국공사관에서 제작된 지도 (정확히는 미국 대리공사 Allen의 스케치)에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된 데서 비롯되었다.

정동공원입구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정동공원입구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역사적으로도 이 길은 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을 연결하는 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왕의 길’ 종착점은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경희궁이었기 때문이다. 주말 방문해보니 이미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찾았다.

"아관파천을 배웠지만 왕이 이렇게 작고 왜소한 길로 몰래 피신한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느껴진다"는 대학생 관람객도 있었다. 또 다른 시민은 "약소국가의 황제가 암살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금은 3층의 석탑만 남아 있지만 당시 러시아공사관은 외교1번지 정동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위치도 덕수궁을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하였다.

지금은 3층의 석탑만 남아 있지만 당시 러시아공사관은 외교1번지 정동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위치도 덕수궁을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하였다.

왜 고종은 많은 외국 공사관 중 러시아 공사관을 선택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세를 알아야 한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 땅인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나서서 그 땅을 돌려주라고 일본을 압박하자, 세 강대국과 맞서 싸우기에는 힘이 약했던 일본은 요동반도를 돌려주게 된다.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이런 국제관계를 눈여겨 본 민비는 일본보다 더 강해 보이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력을 발휘한다. 당연히 일본은 민비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을 일본의 의도대로 이끌 수 없다고 판단, 을미사변(민비 시해사건)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눈앞에서 부인 민비의 시해를 목격한 고종으로서는 탈출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주는 음식과 통조림 외에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궁에서 쫒겨났던 엄상궁을 10년 만에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던 일본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밀리에 러시아측과 접촉했다. 러시아로서도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던 차에 고종 일행의 러시아 공사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조선을 두고 벌이던 강대국들의 치열한 쟁탈전에서 고종을 확보한 러시아와 미국이 득세하게 됐고, 고종은 친일파를 숙청하고 환구단을 세우며 대한제국를 출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일부. 지금은 팔각의 황궁우(신위를 봉안하던 건물)와 석고만 남아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일부. 지금은 팔각의 황궁우(신위를 봉안하던 건물)와 석고만 남아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375일후인 1897년 2월 20일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그가 그리던 꿈을 담게 된다. 조선을 자주독립국, 중국과 동등한 황제국으로 격상시켜 조선의 위상과 자주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종의 꿈은 일제에 의해 1907년 강제퇴위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 꿈과 역사는 살아 있다.

러시아 공사관 바로 앞 정동공원은 수많은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구한말 열강들의 정치, 외교1번지였다.

러시아 공사관 바로 앞 정동공원은 수많은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구한말 열강들의 정치, 외교1번지였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지금 지하 1층과 지상에 하얀 3층탑만 남아 있지만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2021년에 원형이 복원된다고 하니 좋은 역사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 힘들게 되찾고 개통된 120m의 좁고 볼 것 없는 길에는 구한말과 대한제국 개화기의 아픈 역사와 함께 격변기에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자주독립국으로 회복하려는 고종의 슬픈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보수한 환구단 정문의 모습.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고종은 황제 즉위식과 대한제국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보수한 환구단 정문의 모습.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고종은 황제 즉위식과 대한제국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 고종의 길
○구간 : 서울 중구에 있는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총 120m 길
○정식개방 : 10월 (8월 한 달간 시범 개방)
○운영시간 : 오전 9시~ 오후 6시 (월요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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