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유진상가'를 아시나요?
발행일 2018.07.03. 15:31
서울 서부권역의 교통 요충지 홍은사거리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 하나가 있다. 1970년 지어져 햇수로 48년을 맞은 ‘유진상가’다.
홍제천을 복개한 시유지에 폭 50미터, 길이 200미터로 지은 유진상가는 당시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로 서대문의 랜드마크였다. 다른 상가 아파트에 비해 세대별 분양 면적도 월등히 넓어 최소 33평, 최고 68평에 달했다. 주거동에는 ‘유진맨숀’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맨션’이 고급 아파트에 주로 붙었던 이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곳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초기 입주자 중 상당수는 정부와 법조계의 고위직이었다.
유진상가 건물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다. 얼핏 보면 한 개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A동과 B동, 이렇게 두 개의 동이 마주 보고 연결된 형태다. 중앙 정원(중정)은 A, B동을 연결하는 일종의 요충지 역할을 한다.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오면 중정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길이가 160m에 육박하고, 폭도 16m나 된다. 중정에는 그네가 딸린 작은 놀이터와 관리실이 있다. 인적이 드물어 황량함마저 감돌지만 입주 당시에는 아이들이 뛰놀던 넓은 마당이었을 것 같다.
주거동의 복도는 최근의 복도형 아파트와 비교해도 공간이 매우 넓다. 집집마다 장독과 화분을 내놓았지만 통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다. 대부분의 세대가 실내를 교체해 입주 초기의 분위기는 많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공용 공간에는 나무로 된 창틀과 오래된 철문이 달려 있어 아파트의 연식을 짐작케 한다.
옥상은 요즘 말로 ‘테라스형 아파트’에 가깝다. 넓은 옥상 공간에 화분을 내놓아 작은 정원처럼 꾸몄다. 바람에 흩날리는 빨래에선 왠지 모를 정겨움이 묻어난다. 대부분 20여 년을 넘게 산 토박이들이라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지내는 집들이 많다.
옥상 너머 풍경은 A동과 B동의 차이가 크다. 남쪽의 A동에선 인왕시장을 비롯해 홍제동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 공사 현장이 뒤섞여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B동은 바로 앞에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가 시야를 가리고 머리 위로는 고가도로인 내부순환로가 지나고 있어 딱히 풍경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A동과 B동은 원래 5층 높이의 쌍둥이 건물처럼 지어졌다. B동의 높이가 지금과 같이 낮아진 건 ‘내부순환로’가 들어서면서부터다. 1992년 내부순환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B동 주민들이 서울시에 보상을 요구했고, 1997년 94가구에 보상이 완료되면서 3~5층을 뜯어낸 것이다.
내부순환로가 들어선 후 B동은 차량 소음으로 입주를 꺼리는 경우가 늘어 현재는 서대문구 신지식산업센터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청년 예술가를 위한 공간도 생겨 사실상 공공 건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유진상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안보’다. 유진상가를 짓던 시절은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1968년의 김신조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잇따른 북한의 침투로 ‘안보’가 중대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유진상가 위치는 북한군이 구파발을 뚫고 남하할 경우 이를 저지해야 하는 ‘최후의 방어선’에 속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진상가는 군사 시설물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1층 가로변에 거대한 기둥(필로티)을 세우고 일정 공간을 확보한 것은 유사 시 아군 전차의 진지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또 기둥을 부술 경우 아파트가 넘어지면서 거대한 장애물 역할도 할 수 있어 이른바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전술적인 곳이었던 셈이다.
한때 서대문의 랜드마크였던 유진상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흉물 취급을 받고 있다.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 지역 대부분의 후보는 대표 공약으로 ‘유진상가 철거’를 내세웠다. 사진을 찍던 필자에게 주민들이 던진 질문은 재건축에 관한 것이었다. 2010년 시작된 재건축 논의는 그동안 지지부진했지만 지방선거가 끝났으니 다시 속도를 낼 지 모른다.
언젠가는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아파트가 또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건물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는다. 유진상가를 그저 낡은 건물이 아닌 남북 대결의 아픈 현대사를 투영한 공간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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