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지키고 싶은 '오래가게' 39곳

서울사랑

발행일 2017.11.22. 12:17

수정일 2017.11.25. 14:43

조회 3,400

명신당필방 ⓒ서울사랑

명신당필방

50년 한자리에 있었어도, 3대가 이어온 가업이어도 별로 특별할 것 없다고 말하는 오래가게의 주인들. 그들은 그저 손님을 위한 마음으로 긴 세월 가게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가게 안 빼곡한 문방사우 ⓒ서울사랑

가게 안 빼곡한 문방사우

명신당필방 : 좋은 문방사우로 창작을 지원하다

명신당필방(明新堂筆房)의 ‘명신(明新)’은 ‘날로 달로 늘 새롭게 나아가라’는 뜻. 30여 년 전 출발의 의미를 담아내건 그 이름에도, 출입문 옆에 상징처럼 매단 붓에도, 가게 안 서랍장과 의자에도 이제는 지나간 세월만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명신당필방의 김명 사장은 시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받았다. 남편 이시규 선생은 서예가이자 교수로 후학에 힘쓰고 있다. 똑같은 붓 한 자루라도 열 사람이 잡으면 열 가지 다른 평이 나온다고 할 만큼 민감한 도구, 문방사우. 김명 사장은 손님이 쓰임새에 딱 맞는 도구를 구입할 수 있도록 어떤 물건이라도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직원 모두 서예를 전공한 현직 작가라 문방사우에 대해 해박하다. 김 사장은 명신당필방을 단순히 제품만 판매하는 상점이 아닌 직접 재료를 연구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좋은 재료를 얻으려면 시대가 바뀌면서 변해가는 자연환경과 기후변화 같은 것을 파악해야 하고, 재료를 만드는 사람과의 교감도 반드시 필요하죠.”

그렇게 발굴한 좋은 재료는 창작자가 무궁무진한 예술 활동을 펼치는 큰 바탕이 되리라 믿는다.

종로양복점 이경주 사장 ⓒ서울사랑

종로양복점 이경주 사장

종로양복점 : 맞춤 양복의 고전이 되다

1916년 보신각 옆에서 시작을 알린 종로양복점. 올해로 101년째다. 3대째 ‘손님이 왕’이라는 철칙은 변함없고, 그 덕에 단골손님들도 여전하다. 아버지에 이어 재단 가위를 잡은 이경주 사장은 젊은 시절 청계천에 있는 대한복장학원에서 맞춤 양복 기술을 배웠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지침은 정성이다. 정성을 쉬지 않는다는 뜻의 ‘지성무식(至誠無息)’은 이 사장이 지금까지도 양복 한 벌 한 벌을 만들 때마다 잊지 않는 사자성어다. 원단과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주문한 사람에게 잘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맞춤 양복은 한때 기성복에 밀려 주춤했지만, 최근 ‘내 몸에 딱 맞고 세상에 한 벌밖에 없다’는 맞춤 양복의 매력을 알아본 젊은 고객이 늘고 있다. 이 사장은 지금도 틈틈이 백화점에 들러 기성복 트렌드를 파악하고, 외국 잡지나 TV도 유난히 신경 써서 본다. “오래된 가게라는 것만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는 그에게 양복 한 벌 잘 만들고 싶은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화이용원 지덕용 이발사 ⓒ서울사랑

문화이용원 지덕용 이발사

문화이용원 : 50년 경력 이발사의 녹슬지 않는 가위

문화이용원의 문을 여는 순간 1970년대, 어쩌면 그보다 더 예전일지 모르는 시대로 순간 이동하고 만다. 문짝이 뒤틀려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서랍장, 하얀 정사각형 타일을 붙인 세면대, 투박하고 무거워 보이는 의자 등 모두 이곳 주인 지덕용 이발사와 5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지나온 것들이다. 지 이발사는 어릴 때 청주에서 서울 혜화동으로 유학 와 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이용원에 머리를 자르러 왔다가 “할 거 없으면 기술을 배워라”라는 당시 이발소 주인의 제안을 받고 이발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집이 근방이어도 가지 못하고 이용원 바닥에 야전침대를 놓고 자는 나날이었다. 겨울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1시간씩 장작 피워 난로 때고, 밤에는 공중 수도에서 물 긷는 일로 하루를 마감했다. 군에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배운 기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이병도, 국문학자 이희승, 시인 조병화 등 이 시대 존경받는 선생들이 문화이용원의 단골손님이었다. 정·재계 인사도 숱하다. 교련 검열을 피해 급히 머리를 자르고 등교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한창때는 이 작은 이용원에 이발사만 9명이었지만, 지금은 지 이발사 혼자 남았다. 젊은 친구에게 기술을 가르쳐줄 의향이 있느냐고 물으니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는 길”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의 말대로 이발소가 사양길인지, 언젠가 문화이용원도 문을 닫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여든의 연로한 이발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정갈한 흰 가운을 걸치고 가위질에 여념이 없다.

송림수제화 ⓒ서울사랑

송림수제화

송림수제화 : “나를 키운 건 손님들 발”

1936년부터 을지로 골목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며 수제화를 만들어온 송림수제화. 임명형 사장은 한평생 신발에 몰두한 아버지의 업을 물려받았다. 송림수제화는 1950년대 후반 국내 최초로 수제 등산화를 제조했다. 등산화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등산을 하고 싶은데 신발이 마땅찮은 사람이 하나둘 찾아와 안전하고 편한 신발을 만들어달라 부탁한 것이 시작이었다. 손님의 의뢰와 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 방침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한 사람을 위해 무려 스무 켤레의 신발을 만든 적도 있다. “평생 내 신발을 소유해본 적 없다”는 그 손님에게 편안한 신발을 만들어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윤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임 사장은 “그런 손님들이 내 기술을 키워준 것”이라 단언한다. “내가 기술이 좋아서 그 신발을 만든 게 아니에요. 손님이 내 기술을 키워줬으니 그만큼 만들어드린 거지.” 신고 있는 신발의 모양새만 보고도 발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임 사장은 이미 수제화 분야에 통달한 듯 보였다.

종로·을지로 일대 `오래가게` 39곳 ⓒ서울사랑

종로·을지로 일대 `오래가게` 39곳

시민 추천, 전문가 자문 등을 통해 서울의 노포(老鋪) 39곳이 ‘오래가게’로 소개됐다. ‘오래가게’는 시민 공모로 붙여진 이름. ‘오래된 가게가 오래 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수수한 모습과 강직한 정신의 오래가게. <서울사랑>은 3회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문의 : 관광사업과 관광정보팀 02-2133-2783, www.seoulstory.kr)

글 안송연 사진 홍하얀
출처 서울사랑 (☞ 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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