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유홍준 교수의 서울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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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1,000 Date2017.11.06 10:57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이면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 산수화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서울사랑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이면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 산수화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 편’ 1권과 2권을 내놨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거대 도시 서울의 문화유산과 역사를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통찰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어떻게 서울을 예찬했을까?

“서울은 누구나 다 잘 아는 곳이다. 굳이 내 답사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전문적·대중적 저서가 넘칠 정도로 많이 나와 있다. 그래도 내가 서울 답사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서울을 쓰지 않고는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기를 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유홍준 교수는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서 자랑과 사랑으로 ‘서울 편’을 썼다고 한다. 역사 도시로서 서울의 품위와 권위는 무엇보다 조선왕조 5대 궁궐에서 나온다고 강조하는 유 교수가 조선왕조 500년이 창출한 가장 대표적 유형 문화유산이라고 극찬한 종묘와 서울의 5대 궁궐, 한양도성 건설과 관련한 부분을 소개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서울사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종묘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와 그곳에서 행하는 종묘제례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일종의 신전인 셈이다. 모든 민족은 제각기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신전을 갖고 있고, 그 신전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을 건축적으로 표현했다.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중국의 천단, 일본의 이세 신궁 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종묘다.

우리가 종묘 건축에 눈을 뜬 것은 반세기가 채 안 된다.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종묘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근, 김중업 등 해방 후 제1세대 건축가들은 종묘 건축의 미학적 함의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하며, 전통 건축물임에도 현대건축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감동적인,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예찬했다. 스테인리스스틸과 티타늄 같은 금속 재료를 사용하고, 사각 틀에서 벗어난 독특한 형태미를 구사하는. 파격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1997년에 종묘를 관람한 후, 15년 지나 가족을 대동하고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가족에게 종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국인은 이 건물에 감사해야 한다”는 소감을 남긴 그는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는 정전을 보면서 “민주적”이라고 평했다. 똑같이 생긴 정교한 공간이 나란히 이어지는 모습에서 권위적이지 않고 무한한 우주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깊은 사색의 심연으로 인도하다

프랭크 게리의 평처럼 종묘의 건축 미학은 정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0m가 넘는 맞배지붕이 20여 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해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공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종묘 정전 앞에 서면 누구나 경건해지고 신비로움에 빠져든다. 종묘야말로 조선왕조 500년이 창출한 가장 대표적 유형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럼 종묘 답사는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와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 정취에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낄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 있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것이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정전의 지붕과 월대가 온통 눈에 덮여 흰빛을 발하고, 거기에 줄지어 늘어선 검붉은 기둥이 자아내는 침묵의 행렬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사색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덕수궁의 가을 풍경. 조선의 궁궐은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미학을 담고 있다 ⓒ서울사랑

덕수궁의 가을 풍경. 조선의 궁궐은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미학을 담고 있다

서울의 상징, 5대 궁궐

세계 어느 나라든 한 시대의 수도이던 왕도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이던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 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법궁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서울에 궁궐이 5개나 자리한 내력에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서려 있다.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건국한 조선은 2년이 지난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지었다. 그러나 천도 후 얼마 안 되어 벌어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수도를 다시 개성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차지한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새로 창덕궁을 지었다. 궁궐은 임금이 업무를 보는 곳이자, 왕과 왕의 직계존속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계속 궁궐 규모를 확장하거나 별궁을 지어야 했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 곁에 수강궁을 지었다. 지금의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을 맞대고 있어 둘을 합쳐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소실되었고 피란지에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옛 사저를 행궁으로 삼았다. 훗날 이 행궁을 경운궁(현재 덕수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은 광해군 때에, 경복궁은 흥선대원군 때에야 비로소 재건했다. 광해군은 경덕궁(현재 경희궁)을 짓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퇴위하고 말았다. 인조 때에 완공한 경덕궁은 규모가 꽤 커서 동궐에 대비해 서궐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5대 궁궐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동물원이 되었으며, 경희궁은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며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 튼실해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 본연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한양도성도`를 보면 옛 한양의 영역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빨간색은 도로망이다 ⓒ서울사랑

`한양도성도`를 보면 옛 한양의 영역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빨간색은 도로망이다

600여 년 전에 치밀하게 조성한 계획도시

서울은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古都) 중 하나다. 더욱이 서울은 로마나 아테네처럼 오래된 과거 위에 현재가 얹힌 도시가 아니고, 중국 시안이나 일본 교토처럼 수도 지위를 내준 역사 도시도 아니며, 600여 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이자 고도다. 역사 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공간의 매력은 앉음새에서 나온다. 서울처럼 도심 사방을 산이 감싸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쳐진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양도성 안쪽 모습을 그린 ‘한양도성도’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등 반경 약 2km의 내사산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 부정형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싸여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 있다.

서울은 이처럼 자연경관이 뛰어난 앉음새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600여 년 전에 치밀하게 조성한 계획도시라는 점에서도 세계 건축사에 빛나는 한 장을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무렵 유럽 도시들도 시청과 성당을 중심으로 설계하기는 했지만, 서울처럼 인구 10만~20만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도시 건설 사업은 아니었다. 무학대사가 한양 정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도 신중했다. 풍수에 높은 안목과 학식 있는 당대의 경륜가들을 총동원해 검토한 결과였다. 학자마다 여러 곳을 신도읍 물망에 올렸고, 공사를 시행하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다가 마지막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새 도읍지 물색 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 건축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한양도성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길이 5만9,500척으로, 공사에 동원한 인원이 12만여 명에 이르는 대역사였다 ⓒ서울사랑

한양도성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길이 5만9,500척으로, 공사에 동원한 인원이 12만여 명에 이르는 대역사였다

서울은 600여 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

한양도성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길이 5만9,500척(약 18.6km)에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했다. 한양도성 축조는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농한기에만 이루어져 두 차례에 걸쳐 시행했다. 태조 5년(1396년) 1~2월, 49일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 등에서 11만8,000여 명을 동원했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이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12만 가까운 인부를 동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희대의 대역사(大役事)였는지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은 완공 후 몇 차례 홍수와 한파로 곳곳이 무너져 그때마다 보수 공사를 해야만 했다. 특히 평지에 쌓은 토성은 문제가 많았다. 이에 세종 4년(1422년), 전면적인 한양도성 보수 공사를 단행해 토성을 없애고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역사를 다시 벌였다. 이렇게 세종 때 완공한 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한양도성의 기본 골격이다.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으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 편 ⓒ서울사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 편

유홍준 교수는 ‘서울 편’을 모두 네 권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1권과 2권을 출간했는데, 1권은 종묘를 시작으로 창덕궁·창덕궁 후원·창경궁 등 궁궐을 살폈고, 2권은 조금 더 범위를 넓혀 한양도성·자문밖·덕수궁과 그 주변·동관왕묘·성균관 등을 다뤘다. 앞으로 나올 3권은 낙산·인왕산·북촌·서촌을 다루고, 4권에서는 북한산·한강·암사동 선사유적지 등을 중심으로 쓸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서울 편’까지 포함 모두 열네 권을 발간했다.

정리 이정은 사진제공 창비, 중구청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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