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잠두봉이 '절두산'이 된 사연?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17.05.25. 17:00

수정일 2017.05.25. 17:41

조회 4,525

절두산 순교기념광장에는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최용수

절두산 순교기념광장에는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한강아, 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 순교의 터, 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 물결 가득 영혼의 빛살로 흐른다”
- 이인평 ‘영혼의 강’ 시의 일부

강북 한강공원을 따라 라이딩을 하다 합정동 강변에 이르면 30m나 되는 가파른 절벽을 만난다. 절벽 위 원형지붕과 종탑이 숲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그 아래 옛 양화나루터에서는 개화기에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시, ‘영혼의 강’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시간의 흐름이 겹겹이 층을 이룬 곳, 이곳은 1997년 사적 제399호로 지정된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이다.

합정동 한강변에서 바라본 잠두봉(절두산) 모습, 가파른 절벽과 건물이 어울려 비경을 연출한다. ⓒ최용수

합정동 한강변에서 바라본 잠두봉(절두산) 모습, 가파른 절벽과 건물이 어울려 비경을 연출한다.

이곳은 무악산 지맥이 와우산을 거쳐 한강변에서 솟아오른 봉우리이다. 불룩하게 솟은 모양이 마치 ‘머리를 쳐 든 누에’를 닮아 ‘잠두봉(蠶頭峯)’이라 불렀다. 잠두봉은 양화진(楊花津)과 선유봉(仙遊峰, 지금의 선유도 공원), 그리고 한강으로 떨어지는 낙조가 어울려 마포팔경 중 으뜸인 ‘양진낙조(楊津落照)’를 만들어낸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양도성과 가까워 사대부와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였다. 9대 왕 성종이 형, 월산대군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찾은 곳이었다. 중국 사신들 또한 배를 띄워 시회(詩會)를 즐기고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 요구하던 장소 중 하나였다. 당대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양화진’의 배경인 이곳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옛 의관인 순교자기념관 건물 모습 ⓒ최용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를 기리는 순교자기념관 건물 모습

양화진이 언제부터 나루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식적으로는 '고려사'에 처음 이름이 나타난다. 위쪽 잠두봉과 남쪽의 선유봉을 중심으로 비스듬한 모래톱이 형성되어 뱃나루의 조건을 잘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양화나루는 과거 교통의 요충지이자 운송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후에는 ‘한강 5대 나루’ 중 하나가 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을 때에는 한양도성 서측을 방어하는 군사진영으로서도 활용되었다. 한강상류 송파진, 중간지점 한강진과 함께 조선시대 삼진(三鎭) 중 하나로, 7품 이상 진장(鎭將)이 배치되었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조선에도 천주교 전래가 시작되었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였고,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전교활동을 했다. 이에 조선은 “제국주의와 천주교가 유입된다면 국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천주교를 금지하고, 프랑스 신부를 처형하는 등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병인양요(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가 일어났던 1866~1871년에 발생한 ‘병인사옥(박해)’에서 천주교 신자 8,000 ~ 1만여 명이 순교를 하고,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되었다.

순교자기념광장에는 1984년 5월 4일에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흉상이 있다 ⓒ최용수

순교자기념광장에는 1984년 5월 4일에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흉상이 있다

특히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잠두봉은 오랑캐에 의해 더렵혀졌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써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며 프랑스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이곳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1871년 4월 대원군은 한강이 보이는 곳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곳에서 처형된 신자의 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29명(성명 확인 24명, 미확인 5명)으로 밝혀졌다. 이곳에는 이들을 기리는 순교자 기념탑이 설치돼 있다.

해설자의 대원군 척화비 설명을 듣고 있는 공군사관학교 장병들 ⓒ최용수

해설자의 대원군 척화비 설명을 듣고 있는 공군사관학교 장병들

이곳은 1956년 순교성지 조성 공사 진행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형으로 목이 잘려 죽은 곳”이라는 지역 주민들 구두전승이 있어 이때부터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다. 1984년 5월 4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방문했고, 1966년에는 병인양요 100주년을 기념해 양화진·잠두봉 일대에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했다.

기념관은 지하 2층에서 지상 1층 건물로, 한국순교복자기념 ‘순례성당’과 ‘박물관’ 그리고 28위 성인을 모신 ‘지하묘소’가 있다. 순례성당 설계자 이희태 씨는 “순례성당의 원형지붕은 옛 선비들의 ‘갓’을, 높이 솟은 종탑은 ‘칼’을, 지붕에서 흘러내린 사슬은 ‘족쇄’를 형상화 한다”고 말한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 한국 최초 신부인 김대건의 동상,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흉상,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

순교기념광장의 순교자 기념탑을 둘러보는 시민들 ⓒ최용수

순교기념광장의 순교자 기념탑을 둘러보는 시민들

‘장소란 시간이 녹아있는 이야기의 지층’이란 말이 있다. 즉,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합정동 한강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게 된다면, 양화진·잠두봉이 절두산이 되기까지 숨겨진 이야기의 층을 하나씩 벗겨보자. 나들이의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힐링은 덤으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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