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과거와 미래를 걷다’ 세운상가 도보투어
발행일 2017.03.06. 16:33
서울 전자‧전기 산업의 메카 세운상가가 새 옷을 갈아입는다. 1971년 준공된 주상복합단지 세운상가는 ‘우주선도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돌 만큼 능력 있는 장인들이 자리 잡은 터전이다.
1990년대 이후 재개발 논란 속에 방치되며 퇴락해가던 세운상가. 서울시가 지난해 2월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세운상가 살리기에 돌입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스타트업 기업들을 지원하고, 세운상가 활성화 아이디어 사업 공모전을 펼치며 도시재생사업에 나서 활력을 되찾았다.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세운상가에서는 그동안 재생사업 성과를 발표하는 ‘한 걸음 더 세운’ 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 ▲주민공모사업과 기술협업프로젝트 성과물 전시회인 ‘세운 쇼케이스’ ▲세운상가 일대를 탐험하는 도보투어 ‘세운 사파리’ ▲세운상가 기술을 주제로 한 ‘세운 콘퍼런스’가 펼쳐진다. 이 가운데 '세운 사파리' 행사에 참여해 봤다.
세운상가로 떠나는 시간탐험대
지난 2월 27일 세운상가 3층 ‘세운 사파리’ 행사장. 입구에는 ‘세운 쇼케이스’ 전시가 한창이었다. 벽면 가득히 세운상가 수리 장인들의 모임인 ‘수리수리협동조합’의 땀과 열정이 배인 활약상이 탐방객을 반갑게 맞았다. ‘손끝기술학교(세운상가 운영)’가 만든 3D프린터와 전자스피커가 눈길을 끈다. 직접 증강현실을 체험해볼 수 있는 코너도 이색적이다. 전시장 가운데는 세운상가 역사를 정리한 부스도 마련돼 탐방객의 이해를 도왔다.
전시장을 지나니 ‘세운 사파리’ 안내가 보였다. 이번 행사기간에 운영하는 코스는 총 세 가지. ▲세운상가의 과거와 미래를 사진으로 비교해보는 ‘순간포착, 세운의 시간탐험대’ ▲세운상가에서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들을 만나는 ‘청춘이 세운 예술’ ▲세운상가 기술 장인들과 만나는 ‘세운에서 만나는 사람들 여행’이다.
‘순간포착, 세운의 시간탐험대’는 가이드와 함께 세운상가 곳곳을 누비며 세운상가에 얽힌 과거사를 톺아본다. 가이드를 맡은 황예지(24) 씨가 동료와 함께 지난해부터 세운상가를 12주나 직접 돌며 고안해낸 코스다.
무엇보다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진이 애호가들의 관심을 끈다. 길게 늘어선 세운상가 점포들을 가이드가 나눠준 과거 사진과 겹쳐보았다. 프레임 속 소실점까지 점점이 늘어선 모습이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판박이다.
역사의 곡절 묻은 세운상가의 탄생 배경
세운상가 건축에는 역사의 곡절이 묻어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미군 폭격에 목조건물 화재피해를 심하게 겪었다. 도쿄 시내 건물 60%가 불에 탔을 정도다. 일본은 식민지 수도 서울의 화재 피해를 막기 위해 ‘소개공지(불이 옆 공간으로 옮겨 붙지 않게 만든 공간)’를 만들었다. ‘소개공지’로 비어있던 곳이 오늘날 세운상가 자리다.
일본 패망 이후 버려진 터에는 판자촌과 사창가가 들어섰다.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 서울 시장은 판자촌이 도시 경관을 해친다며 모두 없앴다. 그 자리에 주상복합 건물을 올렸다. 세운상가는 그렇게 들어섰다. 5층까지 상가로 쓰고 그 위로는 주거지로 썼다. 처음 세운상가가 지어질 당시에는 유명인이 많이 살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무실로 쓰인다.
공중 도로로 연결되는 세운상가
판자촌을 감추기 위해 급조된 측면이 있지만, 세운상가는 한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이 빚은 예술품이다. 세운상가와 이어진 청계상가 건물 8층에 올라가면 파란색이 투과되는 천장과 만난다. 참가자 이새봄(28) 씨는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조명”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영화 <도둑들>에도 등장하는 이 장소는 김수근이 ‘중정(건물로 둘러싸인 외부공간)’ 양식으로 지은 공간이다. 중정 양식은 당시로써는 새로운 기법이었다. 네모난 모양이 중첩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청계상가 6층 옥상으로 가면 김수근이 만든 조형물이 보인다. 건물 외벽을 도자기로 장식해 독특한 느낌을 준다. 낡은 건물인 줄로만 알았던 청계상가에 근대 예술품이 박혀있다는 사실에 투어 참가자들은 연신 셔터를 누른다.
공공시설이 완비된 이상적인 입체도시로서의 서울을 구현하려 애썼던 김수근의 노력이 세운상가다. 프랑스 근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집합주택을 참고했다고 한다. 세운상가는 모든 건물이 이어지는 설계가 특징이다. 건물마다 보행자용 데크를 둬 공중 도로를 이루도록 했다.
이런 김수근의 애초 구상과 달리 건축업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중도로는 중간중간 끊겼다. 사람이 다니지 못하면서 기능성이 크게 떨어졌다. 지금은 '다시 세운 프로젝트' 일환으로 길 잇기 공사가 한창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의 공중 통로를 연결해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현대 건축과 일본식 가옥이 공존하는 곳
청계상가 12층에서 한 층을 더 걸어 올라가면 옥상이 나온다. 남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최고의 전망을 뽐낸다. “다음에 갈 곳은 저쪽이에요.” 가이드의 손길이 옥상 아래 한쪽을 가리켰다. 우뚝 솟은 상가 건물 좌우로 일제 패망 직후 제멋대로 자라난 판자촌들과 낡은 일본식 가옥이 내려다보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본래 모습 그대로다.
건물을 벗어나 청계상가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좁은 길목에는 손으로 직접 쓴 간판들이 늘어서 있어 영화 세트장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전히 일본 가옥들이 남아있는 곳이에요.” 일본식 근대 가옥들은 서까래가 각지고 밖으로 돌출한 모습이다. 창문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벽면에 발린 시멘트는 거칠다. 골목을 걷다보면 이런 특징을 가진 가옥들이 심심찮게 마주친다.
활기찬 역사건축물로 거듭날 세운상가
세운상가를 둘러싼 재개발 논의는 잊을만하면 되풀이됐다. 2003년에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나왔고, 2006년에는 '도시 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생겨 세운상가를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최근 서울시가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세운상가를 도시재생 대표 사례로 만들면서 지금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됐다.
투어에 참여한 장미나(33) 씨는 “서울시에서 도시 재생을 한다기에 궁금해서 참여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요즘 오프라인 상점에서 장을 보는 사람이 적어지다 보니 세운상가도 죽어가는 공간일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활기 넘치고 사람 사는 곳 같아 좋다”고 소감을 밝힌다.
유경빈(24) 씨도 “주변을 지나다니면서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못 보던 걸 볼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360도 카메라를 연신 돌려댔다.
일제 지배의 흔적 위에 현대건축의 예술성을 담아냈던 세운상가. 개발의 뒤안길에 밀린 채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서울의 역사와 미래를 품는 활기찬 첨단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 이 기사는 청년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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