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선생'의 40년 외길인생을 듣다

서울시설관리공단

발행일 2016.12.22. 10:30

수정일 2016.12.22. 17:48

조회 2,224

후암초상화연구소 김진삼 화백

시청광장 지하도상가 ‘후암초상화연구소’ 김진삼 화백

“사실성에 개성을 더해야 진짜 초상화죠”

시청광장 지하도상가에서 후암초상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진삼 화백. 20대 후반이던 1978년부터 이 자리에서 시작해 올해로 38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상화 그리는 일에 푹 빠져 살다보니 어느새 칠순이 되었다.

후암초상화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린 곳. 입구에는 실물과 똑같이 생긴 힐러리가 환하게 웃고 있다. 힐러리의 초상화는 사진인가 싶을 정도로 정교해서 지나가던 사람들도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곤 한다. 김수환 추기경, 김구 선생 등 유명인사들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얼굴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으로 길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후암초상화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진삼 화백의 작품들이다.

그는 20대 후반이던 1978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초상화 그리기를 시작해 지금껏 시청광장 지하도상가의 ‘초상화 선생’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나이 벌써 일흔이 되었다.

“초상화는 다른 정물이나 동물을 그리는 것과 달라서 조금만 오차가 나도 딴 사람이 되어 버려요. 그림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40년 넘게 초상화만 그렸으니 이력이 날만도 할 텐데 김진삼 화백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주로 등장하는 그림을 인물화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도 실존 인물을 닮게 그리면 초상화라고 한다. 초상화란 특정인의 얼굴과 자태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닮아야 한다. 인간의 몸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오묘한 곳이 얼굴이라고 한다. 이 얼굴을 닮지 않으면 그 그림은 인물화라고 불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초상화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것이 초상화가들이 느끼는 어려움인가 싶었지만 김진삼 화백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후암초상화연구소 김진삼 화백

“초상화를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하는 고객들이 더 많기 때문에 40년 가까이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어요.”

초상화를 그린 지 40년 가까이 되었어도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직도 단련이 안 된다며 웃는다. 이는 의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 속의 사람’을 떠올리며 의뢰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진 한 장에 의지해 그리기 때문에 생기는 간극이다.

“초상화를 의뢰하시는 분들의 경우 최근에 찍은 사진이 아니라 20~30년 전에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와서 그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진에 의지해 그리다 보니 자식들의 기억 속 부모님의 모습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얼마 전에도 아버지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사진을 가지고 오신 분이 있었어요. 며칠 공을 들여 사진대로 그려드렸더니 ‘아버지와 안 닮았다’고 하더군요. 함께 왔던 손자가 ‘어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초상화를 받아가셨어요. 손자도 할아버지를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초상화를 보며 할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자식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으니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초상화를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하는 고객들이 더 많기 때문에 40년 가까이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이었는데 그 분도 아버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와서는 초상화를 의뢰한 적이 있어요. 생전에 찍은 사진이라곤 달랑 그것 한 장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구멍 나고 후줄근한 속옷차림으로 밭에서 일하다가 찍은 사진이었어요. 예전에는 어르신들이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진을 많이 안 남기고 돌아가신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근사한 회색두루마기를 입혀 드린 적이 있어요. 며칠 후 아들이 찾아왔는데 화실에 들어오자마자 ”우리 아버지 좋은 옷 입으셨네“하며 초상화를 향해 큰절을 하더라고요. 그럴 땐 정말 뿌듯함을 느낍니다.”

후암초상화연구소 김진삼 화백

김진삼 화백은 20대 후반까지는 문화공보부의 미술실에서 근무했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 사표를 내었다고 한다.

“지금과 달라서 공무원 생활이 많이 궁핍하던 시절이었어요. 안정적인 직업도 아니라서 늘 미래가 불투명했답니다. 그땐 공무원보다 초상화 그리는 것이 수입도 더 좋았고 안정적이었어요.”

초창기에는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주변에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와 초상화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초상화를 그리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심이 깊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부모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자식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초상화란 것이 찍어내듯이 뚝딱뚝딱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다 소화할 수가 없었어요. 초상화는 정성이 반인 그림이라 주말도 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땐 초상화 그리는 직원들도 여럿 두고 일을 했더랬다. 하지만 컴퓨터가 생기면서 어렵고 긴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귀해졌다.

“사람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몰려들 때는 그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그리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렇게 한 10년 호황을 누렸지요. 그런데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요. 이 근방에서 초상화 화실을 운영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접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서야 초상화의 진짜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손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는 요즘도 그리면 그릴수록 조금씩 느는 것이 초상화라며 웃는다. 초상화가 호황일 때는 초상화를 배우겠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4~5년 배워서 직접 화실을 낸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화실을 운영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초상화를 배우겠다고 오신 분들 중에는 붓을 처음 잡아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4~5년 꾸준히 배우면 직접 화실을 낼 정도로 실력이 생깁니다. 우리 화실에서 초상화를 배우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서 거기서 지금도 꾸준히 작품활동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럴 땐 가르친 보람이 있지요. 세월이 흐르니 이젠 제자들도 저처럼 백발이 되어 가요.”

후암초상화연구소 김진삼 화백

김진삼 화백은 손이 떨리고 눈이 침침해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초상화를 그릴 것이라고 말한다.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력이 없고서는 결코 제대로 된 초상화를 그릴 수가 없다. 그러나 좋은 초상화는 형상과 심사(心似)는 물론이고 독창성과 개성까지도 다 함께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림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서 40년을 그려도 부족함을 느끼지만 지금도 그림은 그릴수록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 같아 그리기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처 : 매거진 G:HA[지하] 6호(서울시설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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