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버지들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최경

발행일 2016.11.18. 16:28

수정일 2016.11.18. 16:34

조회 679

운동ⓒ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47) 대한민국의 아버지들1 - 왕따 아버지들을 위한 변명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사회적 관계에서 함부로 민낯을 보일 수 없기에 어느 정도는 자신을 포장한다. 뾰족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없어서 스스로를 가두기도 하고, 참기도 하고, 상처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속이 상해도 티를 내지 않으며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애쓴다. 특히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더럽고 치사해도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욕지기를 삼키고, 수모를 당해도 일을 마치고 털어 넣는 술 한 잔으로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야만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땅의 가장들의 비애, 아버지들이 사회생활을 위해 썼던 가면을 벗는 순간은 가장 편안한 집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 비로소 왕이 되는 아버지를 가족들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일터에서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수난을 당하며 힘겹게 버텨내는지 가족들은 미처 알지 못한다. 그저 가부장적인 아버지, 대화가 아니라 명령을 하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어 피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어느 틈엔가 아버지는 가족 사이에서 왕이 아니라 왕따가 돼버린다. 몇 해 전, 아버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많은 가장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처한 위기에 대해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서 잠자고 나오고 하숙생이에요.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엄마 편이예요. 엄마랑 더 얘기를 많이 하지 아빠랑 얘기를 안 해요. 아버지가 딱 들어가면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싹 들어가 버려요.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아내는 등을 돌리고 누워요. 부부가 얼굴을 마주보면 몇 센티미터 안 되는 가까운 거리지만 등을 딱 돌리고 누우면요. 지구 한 바퀴에요. 근데 지금까지 언제나 지구 한 바퀴였어요.”

“사실 저는 억울했어요. 쉬는 날 없이 심지어는 감기몸살이 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무단결근을 해본 일이 전혀 없어요. 왜냐면 그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나한테 돌아오는 게 이건가 그런 생각이 들죠.”

어느새 자식들이 장성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어깨에 지고 견뎌왔던 아버지는 은퇴할 나이가 돼 돌아보니 남은 건, 멀어져버린 아내와 자식들이라고 했다. 그제야 돌이켜보려고 애를 쓰지만 지구 한 바퀴만큼 멀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아들은 갑자기 살갑게 대하는 아버지가 되레 무섭게 느껴진다고 했다. 늘 바빴던 아버지와 여행은 고사하고 외식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데 뒤늦게 느닷없이 같이 술 한 잔 하자, 어디를 가자는 말 자체가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왜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

“그냥 결혼하면 남편이 되고 애를 낳으면 아버지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아버지 이름 그뿐이지 진짜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는 방법을 몰랐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아무것도 저절로 되는 건 없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학습한 것이라고는 가부장적이며 왕으로 군림하던 아버지 모습을 거울처럼 보면서 자란 것이 전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싫어하는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어느 틈엔가 똑같이 복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각하고 변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왕따 아버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20세기에 태어나 19세기 방식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그래서 참 고단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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