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에서 만난 금메달리스트

시민기자 신유리

발행일 2016.08.26. 16:50

수정일 2016.08.26. 17:12

조회 1,303

손기정기념관

손기정기념관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1976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양정모 선수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라 여겼던 ‘마의 벽’, 2시간 30분의 기록을 깬 사나이다. 세계 일등을 했지만 망국의 설움을 가슴으로 안은 채 시상식에 서야 했던 인물.

바로 1936년 일장기를 달고 수상해야 했던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다. 그는 그날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외국인들에게 ‘손긔정, Korea’라고 써주며 자신이 한국인임을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올해는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지 80주년 되는 해다. 2002년 고인이 된 손기정 선수를 더 이상 직접 만날 수 없지만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가볼만한 곳이 있다. 중구 만리동에 자리한 손기정기념공원이다.

​‘도심 높게 솟은 고층건물들 사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서울역에서 길을 건너 십여분 남짓 걸으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유서 깊은 녹음으로 둘러싸인 공원이 보인다.

그의 모교이자 1905년 대한제국 최초의 민립사학인 양정의숙 옛 학교를 개조한 곳으로(본교는 목동으로 이전), 손기정기념관과 도서관, 체육관이 단란히 모여 있다.

공원

공원 입구 농구장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우뚝우뚝 솟은 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사이사이 농구장, 축구장 등 야외 경기장들이 놓여있다.

22년만의 더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한여름의 토요일 오후. 땡볕 더위는 아랑곳없이 운동에 열중하는 청춘들을 지나쳐 계속 걷다보면, 나무 계단을 지나 초록빛 넝쿨이 벽마다 늘어져있는 예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 세 동을 만나게 된다. 제일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기념관, 바로 뒤가 도서관 그리고 오른편에 떨어져있는 건물이 체육관이다.

고풍스런 외관 덕에 과거로 들어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안내데스크를 기준으로 1관과 2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살인적인 더위 탓인지 내가 들어갈 때 나설 채비를 하던 가족 관람객 외에는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단체 방문하시는 분들도 꾸준히 계시고 간간이 오셔서 구경하십니다" 다른 때도 이런가 싶어 안내하시는 분께 여쭤봤더니 늘 이렇게 한가한 건 아니고 찾는 사람들이 은근하게 계속 있다고.

1관은 어린 시절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을, 2관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하던 역사적인 날로 돌아가 손기정 선수가 어떤 역경을 거쳐 금메달을 손에 쥐었는지 보여준다.

​손기정 선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장면일 것이다. 역사적인 금메달이기도 하거니와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대대손손 회자되니 말이다.

사실 이날의 메달은 일본에게도 올림픽 참가 24년 만에 따낸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이날 손기정 선수는 기미가요가 울리는 가운데 그의 본명이 아닌 ‘기태이 손’이라는 일본이름으로 호명됐다. 그는 부상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메달을 수여 받는다.

여기서 잠깐 주목해야할 사람은 그의 왼편 3등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수다. 일장기를 단 이 사람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의 남승용 선수다.

“시상대에 서보니 일장기가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러운지” 그는 고국에 돌아와 일장기를 가릴 묘목을 가진 손기정이 부러웠다고 술회한다. 이날 두 사람이 찍힌 사진에는 하나 같이 웃는 장면이 없다.

손기정 선수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

뜀박질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는 가난하지 않았다면 다른 운동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이라 택한 것이 마라톤이었으니 어쩌면 가난 ‘덕분’에 올림픽 제패를 한 셈이다.

어린 시절, 공부는 않고 뛰기만 하는 아들이 걱정된 어머니는 그에게 잘 벗겨지는 여자 고무신을 주었다. 하지만 손기정 선수는 발과 신발을 새끼줄로 꽁꽁 묶어 벗어지지 않게 한 뒤, 생채기가 나도 매일 뛰어다녔고 결국 어머니는 ‘다비’라는 엄지발가락이 나누어진 일본식 운동화를 선물하셨다. 이 신발은 고무신보다 가벼워 이후로 발에 상처 없이 뛸 수 있었다고. ​

기념관 안에는 손기정에 관한 많은 사진과 자료, 책들과 함께 마라톤을 잘 모르는 일반인을 위한 현대식 자료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뛰기 전에 음식 조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뛰면서 물은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등의 마라톤 깨알팁도 있고, 손기정에 관한 짧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영상관도 있다.

​인근의 시민들에게는 2만 4,000권의 장서가 준비된 도서관과 다양한 스포츠 종목을 수강할 수 있는 체육관도 문화를 즐기는 소중한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손기정 선수는 망국의 비운을 전 세계에 앞에서 보였던 슬픈 마라토너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만큼 행운을 누린 선수도 찾기 힘들다. 그는 대한민국이 최초로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선수단장으로 기를 들었고,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한 88서울올림픽에서 성화 봉송 첫 주자였다. 대한육상연맹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부회장,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선수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육성한 마라톤 후배 중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1등으로 들어오는 기쁨도 맛본다. 올림픽 역사 이래 마라톤 종목에서 금을 획득한 아시아인들은 이 두 사람 뿐이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손기정 선수는 황영조 선수가 고지를 점령하던 이 날 비로소 1936년의 한을 푸는 듯했다.

손기정 선수

손기정 선수의 학창시절 모습과 사용했던 신발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에서 겪었던 아픔의 여운은 깊고 질기다. ‘한국인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손기정,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양정모’ 기념관 한 쪽에는 이런 구절이 써 있다.

손기정 선수가 우리나라 국민임을 만천하가 다 아는데도 올림픽 공식역사에서 그의 국적은 여전히 일본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시즌을 맞아 올림픽 역사에서 잃어버린 그의 국적을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김성태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은 국제올림픽조직위에 손기정 선수의 대한민국 국적 및 한글이름 표기 수정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발의했고, 정부는 당시 금메달을 땄던 독일에 태극기를 단 손기정 선수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이달 17일부터 협상에 들어간다고 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그간 과거의 역사를 훼손한다는 이유를 들어 국적 수정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도모한다는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본다면,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강탈된 국적을 되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올림픽에 어울리는 결정이 아닐까.

월계수나무

공원 내 심겨진 월계수나무

​돌아오는 길목에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 수상 기념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이 거목으로 자라난 것을 보았다. 건물로 치면 5층 이상은 족히 되는 높이. 사람은 지나갈지언정 역사에 남겨진 씨앗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울창하고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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